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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일본미술사

동양미술사 - 일본(헤이안시대)

by cloudy_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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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으로 천도를 행한 794년부터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권력을 확립한 1185년까지를 헤이안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본 미술사에서는 931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784년 교토에 있었던 나가오카쿄 천도부터 1184년까지 교토가 수도로 자리매김했던 기간을 헤이안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중국에서 전래된 중기밀교에 입각한 조형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다이고 천황 재위 말년인 931년까지를 전기로, 그 이후 견당사 폐지로 인한 문화의 일본화가 정립되면서 말법사상에 따른 아미타정토신앙이 유행한 기간을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1. 회화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긴 기간을 아우르는 헤이안시대의 회화도 밀교 회화가 왕성했던 전기와 정토교 회화, 세속화가 주로 유행했던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 헤이안 전기의 회화는 8세기 나라시대에서 숙달된 성당 회화의 기법과 양식을 기초로 하였고, 수도를 교토(헤이안)으로 옮긴 후에도 견당사를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만당晩唐의 회화를 습득하여 발전하였다. 불교계에는 이 시기에 파견한 견당사를 따라 중국으로 유학한 밀교 승려인 입당팔가入唐八家에 의해 중국의 밀교미술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유입된다. 밀교는 열반 후에 성불하는 대승불교의 교리와는 달리 불보살의 진언(다라니), 수인(무드라), 진용(도상)을 바르게 습득하면 현세에 있으면서도 성불할 수 있다는 즉신성불 사상을 특징으로 하여 진언, 수인, 진용이 암암리에 제자에게 전승되는 불교이다. 이에 출가자의 성불대상인 본신불을 총괄하여 교리와 세계관에 근거하여 표현된 양계만다라를 비롯한, 본신불을 본존으로 하는 독존만다라, 밀교의 본초불인 대일여래로 시작하는 법계도, 불세계를 현세에 재현한 장엄벽화 등이 엄격한 도상 규율에 의거하여 다수 제작되었다. 또한 헤이안 전기에는 밀교의 조사상도 왕성하게 제작되었다. 입당팔가 승려인 구카이(空海, 774-835)가 견당사 파견 후 귀국할 때 그의 스승인 혜과(惠果, 746-805)로부터 불화와 함께 진언종의 조사상 5폭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당시 당에서 유명했던 이진(李眞, 약 780-804 활약)의 작품이다. 구카이가 이진의 작품을 본보기로 하여 그린 도지의 <용맹용지상(821)> 등에서 이 시기의 묘사력이 돋보이는 조사상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사상은 구카이의 종교적 정통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밀교의 법계도를 초상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이안 전기의 회화는 밀교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궁중을 중심으로 한 세속화도 제작되었다. 감상적인 요소가 많은 세속화는 9세기에 이르러 전시대 이상으로 중국 당풍의 산수와 화조, 인물 등이 궁정을 중심으로 다수 제작되었으며, 이를 그린 화가로는 구다라노 가와나리와 이 시기 말경에 활약한 고세 가나오카 등이 유명하다. 불화 이외에도 전문화사에 의한 괄목할 만한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해당 작품들은 9세기 것은 물론 10세기 작품도 발견된 것이 없다.

[후기] 헤이안 후기에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밀교 회화도 많이 제작되었지만 10세기 후반부터 말법사상에 따른 석가의 불법을 남기려 하는 법화신앙을 반영한 불화, 사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정토신앙에 의거한 아미타내영도와 아미타당의 장엄벽화 그리고 이 시기 귀족문화가 발전함에 따른 세속화도 다수 제작되었다. 후기의 밀교 회화는 헤이안 전기의 도상을 답습하면서도 양식적으로는 부드러움이 더해지는 등의 일본화가 진행되었다. 10세기의 회화 유품은 그 수가 극히 적기에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는 952년에 완성한 다이고지 <오중탑초중심주복판회> 정도이다. 11~12세기에 이르면 신양식으로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밀교 계통의 불화가 계속해서 제작되는데, 대표적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교오고코쿠지의 <오대존>과 <십이천상>이 있다. 12세기가 되면 이제까지 비밀리에 전승되던 밀교의 도상이 공개되고 신불습합 등으로 인해 다양한 불교 회화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2세기에는 상당히 많은 회화 유품이 남아 있다. 전반기 불화의 섬세한 색채배합과 절금 문양의 다용이라는 특색은 진고지의 <석가여래상>, 보스턴미술관 소장본인 <마두관음상>, 마쓰오지의 <보현연명상>,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본인 <보현보살상> <허공장보살상> <공작명왕상> 등에서 한층 더 현저하게 나타나며, 점차 감미로운 관능성을 가짐과 동시에 공예적 장식성이 증대되어 일본 불화의 난숙함과 쇠퇴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송대 회화의 잠재적 영향 하에 제작된 곤고부지 조치의 <선녀용왕상(1145)>이나, 지코지의 <보현연명상(1153)>, 혹은 다이고지의 <염마천왕> 등과 같이 강하고 힘 있는 묘선과 단순한 색채의 표현을 가진 신경향의 불화도 출현하고 있다. 화려한 귀족 문화의 절정기라고도 불리는 12세기 인세이 시기(1085-1156)는 귀족 취향의 세속화가 다수 제작되기도 하였다. 와카(일본 고유 형식의 시)나 모노가타리 등 문학 표현이 발달하면서 모노가타리에나 우타에(노래를 그림으로 그린 것) 등 소화면 작품의 제작과 감상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특히 궁정 여성이 문예 방면에 큰 재능을 발휘하여 온나에(여성 취향의 그림)라는 상징적이고 낭만적인 가미에(화선지에 그린 장병화나 족자가 아닌 보통 종이에 그린 그림) 표현 양식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섬세한 기법을 구사하는 세련된 양식이 완성되었다. 또한 모노아와세의 유희와 법화팔강 등이 호화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2. 조각과 건축

헤이안 전기는 나라시대 후기를 계승했던 초기를 제외한다면, 중기밀교를 도입한 사이초와 그의 제자인 엔닌, 엔친 등에 의한 천태종과 구카이에 의한 진언종을 중심으로 한 조형활동이 전개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8세기 후반에 성립된 단상을 모방한 비자나무를 재료로 만든 목조가 정착되어 불상의 주류로 형성하게 된다. 헤이안 후기는 황족과 귀족들에 의한 아미타정토신앙을 중심으로 한 조형활동이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당과 통일신라의 내정이 불안해지면서, 894년에 견당사가 폐지되고 이후의 문화교류도 점차 상업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던 때인데 대륙, 특히 당에 대해 '일본화'라는 개념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일본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점점 강해져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화의 경향은 조각에서도 나타나는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특징으로 한 일본풍의 조각을 탄생시켜 11세기 전반에 완성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중기밀교의 종단에 의해 말법초년이 552년에서 1052년으로 정정됨에 따라 아미타정토신앙이 유행하게 되고, 극락정토에서 자비롭게 맞아주는 아미타여래에 대한 인식도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기] 8세기 후반 헤이조쿄(나라)에서 행하여진 도다이지 등의 대사원의 지속적인 조영은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여 관사의 조영이나 유지비용 등을 절감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된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방안으로 794년 헤이안쿄(교토) 천도 때는 모든 사원의 이축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 헤이안쿄의 성내에는 도지와 사이지의 두 사원만 새롭게 조영하였으며 각 사원에 설치되었던 조사사와 조불사도 모두 폐지하였다. 이로 인해 실직한 공인工人들은 민간 공방으로 옮겨 활동하게 되고 재정적인 이유로 재료가 비싼 건칠불이나 금동불이 아닌 주로 목조불상을 일목조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현존하는 작품이 적고, 불상자체에 명문을 남길 수 없는 재질과 기법상의 이유와 더불어 문헌기록도 드물기 때문에 헤이안 전기의 조각사는 아직까지도 불확실한 점이 많이 남아 있다. 헤이안 전기는 나라시대 후기에 단상을 모방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비자나무를 재료로 한 일목조가 계승되고 정착한 시기이다. 불상의 종류도 사이초와 구카이에 의해 중기밀교가 전래되기 이전까지는 전대부터 유행했던 약사여래와 변화관음신앙에 근거한 조상활동이 주를 이뤘다. 더욱이 이 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지방에까지 그 영향을 미쳐 지방에서도 본격적인 목조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모토야쿠시지의 본존과 헤이조쿄로 이축한 후 새롭게 제작된 야쿠시지 본존의 도상이, 헤이안 전기까지 계속해서 조영된 지방의 고쿠분지들의 본존에 계승된다. 그러나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정쟁政爭이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것 등의 국가적 불안상태로 인해 약사신앙의 형태가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것에 만족했던 것에서, 겐보가 당에서 들여온 『칠불약사경』(8세기 전반)에 근거하여 병을 초래하는 근원 또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근원을 적극적으로 제거해주는 강하고 엄한 부처를 구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또한 747년에 고묘 황후가 쇼무 천황의 병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나라현 신야쿠시지의 장륙건칠조 칠불약사여래상(10세기 후반에 태풍에 의해 소실됨)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약사여래상이 조영되었다. 특히 실명한 상태로 일본에 건너온 감진이 약사서상을 휴대하였기에 무사히 바다를 건너왔다고 알려지면서, 8세기 후반 이후에 영험하고 신통한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한층 더 성행하게 된다. 이처럼 나라시대 후반부터의 전통에 따른 작품군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불상, 즉 사이초와 구카이가 본격적으로 들여온 중기밀교의 도상에 의거한 밀교존상도 9세기 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11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 작품을 남겼다. 사이초가 조영한 히에잔 엔랴쿠지의 건물과 조각은 1571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존하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헤이안 전기의 밀교존상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불공과 혜과에 의해 완성된 중기밀교를 계승한 구카이와 그의 제자들이 발원하여 나라시대의 조불사의 흐름을 이어받은 불사들이 제작한 불상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 새롭게 제작되기 시작한 목조로는 신상神像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나라시대 후반에도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초기의 작품으로는 교토 마쓰오대사의 목조여신좌상, 도지의 목조승형하치만신좌상(9세기 후반)과 목조여신좌상(9세기 후반), 야쿠시지의 목조승형하치만신좌상과 목조진구 황후좌상(9세기 말), 목조나카쓰히메좌상(9세기 말)이 있다.

[후기] 아스카시대부터 헤이안 전기까지의 일본 조각과 건축은 대륙의 양식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전개되었다. 그러나 894년에 중국의 문화를 도입함에 있어 큰 역할을 하던 견당사의 파견이 폐지되자 일본의 조각과 건축은 점차 대륙양식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양식, 즉 일본 양식이 성장하게 된다. 헤이안 후기의 시작을 알리는 상으로는 946년에 제작된 교토 간센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들 수 있다. 가미다이고 약사당의 목조약사여래좌상(913)에 비해 체구나 얼굴에 원만함이 더해졌으며 의문선의 수가 줄었고 조각도 얕아졌다. 이러한 특징은 헤이안 후기 조각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인데, 간센지상은 그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993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현 젠스이지 목조약사여래좌상에 이르면 체구의 양감이 더욱 줄어들고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다음으로 말법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조형도 만들어진다. 석가의 불법을 수호하는 자오곤겐이나 하생하는 미륵에게 석가의 불법을 전하기 위해 전국의 산정상에 경전 등을 묻은 경총, 교토부 산젠인 목조아미타삼존상과 같이 사후에 아미타여래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자의 영혼을 맞이하러 온다는 아미타내영신앙에 근거한 내영인을 결한 아미타여래상 등이 이 시대에 새로이 등장하였다. 특히 헤이안 불화와도 상통하는 섬세하고 유려한 선각으로 제작한 도쿄 소지지의 동판선각 자오곤겐상은 자오곤겐상 중의 수작이다. 헤이안 전기부터 불교 문화가 지방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헤이안 후기가 되면 동북 지방에서 규슈 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국에서 많은 불상이 제작되기에 이른다. 이 중에는 나타보리라 불리는 지방양식도 탄생하는데, 나타보리상은 영목으로부터 화현하는 부처의 형상을 이미지화하여 상의 전면 혹은 그 대부분에 수평의 도흔을 남겨 조각한 상의 총칭이다. 나타보리상은 중부 지방, 관동 지방, 동북 지방, 즉 동일본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주로 헤이안 후기에 유행하여 가마쿠라시대까지 제작되었다. 대부분 계수나무나 느티나무와 같은 단단한 재료를 사용하여 일목조로 제작하며, 표면에 채색을 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가나가와현 호조보의 목조약사삼존상(10세기)과 가나가와현 구묘지 목조십일면관음입상, 이와테현 덴다이지 목조성관음보살입상(11세기) 등이 초기의 작품이다. 대승불교와 더불어 중기밀교도 수용하였던 헤이안시대에는 지금까지의 평지 사원과 함께 산악 사원도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중기밀교의 산악 사원에서는 지형상의 제약으로 인해 나라시대와 같은 정연한 가람배치는 보이지 않게 된다. 산악에 가람을 건립한 밀교 사원으로는 사이초의 히에잔 엔랴쿠지와 구카이의 고야산 곤고부지, 와케씨의 진고지와 다카오산지, 고후쿠지 승려 겐케의 무로지, 쇼보의 다이고지 등이 있는데, 이들 사원은 산악의 지형에 맞춰 가람을 조성하였다. 도지 등의 평지 사원에서는 나라시대 후기의 가람배치가 답습되었는데, 헤이안 후기부터는 밀교의 말법사상에 의거한 아미타정토신앙이 유행하면서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법당인 아미타당 앞에 넓은 연못이 만들어지며 아미타정토만다라에 보이는 형식의 가람도 많이 건립된다. 아미타정토신앙에 의해 금당 앞에 넓은 연못을 두는 것은 연못을 건너기 전을 현세, 아미타당 쪽을 열반의 세계로 상정한 형태의 가람배치이며, 이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성행했다. 이외에도 신사의 사전건축으로는 가모신사의 나가레즈쿠리와, 히에대사의 히에즈쿠리라 불리는 간소하면서도 유려한 본전 형식 혹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나 야사카신사 본전과 같이 본전에 예배당이 부속된 새로운 형식, 그리고 기타노신사의 야쓰무네즈쿠리 등이 교토에서 성립되나 현존 유구로는 우지가미신사 본전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3. 공예

헤이안시대 전기에는 사이초, 구카이 등에 의해 신라와 당대의 문화가 수입되어 공예품에 대륙의 영향이 남아있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견당사의 폐지 등 국내의 쇄국적 상황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일본적인 공예품이 제작된다. 헤이안시대 9세기의 도자기는 중국 월주요 청자의 영향으로 제작된 녹유도기에 수주, 완, 명 등의 새로운 기형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의 녹유도기는 헤이안쿄 부근인 라쿠호쿠요, 사나게요, 비호쿠요에서 주도적으로 회유도기와 함께 생산되어졌다. 녹유도기는 10세기까지 아이치현 등에서 생산이 이루어지지만 11세기 초에는 중지된다. 정리하면, 9세기에는 녹유와 함께 경질의 회유도기가 제작되나 1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조잡해진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중국 남방백자를 모방한 형태인 구연부가 두툼한 완이 만들어지게 된다. 12세기 전반에는 아이치현의 도코나메 도기와 아쓰미 반도의 아쓰미 도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반에 이르면 도코나메 도기에 기반을 둔 시가라키 도기(시가현), 탄바 도기(효고현), 에치젠 도기(후쿠이현)가 등장하고, 도고나메 도기와 다른 계보를 가진 세토 도기(아이치현)와 비젠 도기(오카야마현)가 만들어져 6개의 옛날 가마, 즉 육고요를 형성한다. 다음으로 칠공예 역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의 칠기 유례는 매우 적고, 문헌상으로 흑칠, 적칠, 나전 등이 나라시대에 이어 계속 보이며, 10세기에는 금·은의 연출마키에를 이용한 것이 헤이안 전기 칠공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후기에 이르면 칠공예는 금·은의 연출마키에를 이용한 것은 전기와 동일하지만, 금에 은을 포함한 청금을 섞어  그러데이션의 색채효과를 연출한다. 나아가 나전을 이용하는 것도 성행하는데, 대표적인 칠공예품으로 뵤도인 수미단 나전이 있다. 마지막으로 헤이안시대의 금속공예는 범종, 등롱, 불구, 종이 주류를 이룬다. 경은 당대의 양식에서 벗어난 일본풍을 보이고, 문양으로 송학문이 다수 나타난다. 대표적인 송학문경으로는 1141년 기록이 있는 나라 가스가대사의 등화 송학경이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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