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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일본미술사

동양미술사 - 일본(아스카시대)

by cloudy_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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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시대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6세기 전반부터 나라의 헤이조쿄에 천도한 710년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수도는 지금의 나라현 아스카이다. 한 연구자는 아스카시대 후기를 중국의 수·초당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양식이 생겨난 것을 바탕으로 하쿠호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용어는 미술사에서 시대 구분적 용어로만 사용할 뿐 일반적인 역사적 시대 구분 용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1. 회화

6세기 말 회화와 관련된 사료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불교장려책을 펼쳤던 쇼토쿠 태자의 지배 하에서는 도래인을 중심으로 하는 세습적인 화가 집단이 활발하게 회화 제작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스카시대의 남아 있는 회화 유품은 많지 않다. 그래서 조각이나 공예품에 포함되어 있는 회화적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는 예로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의 목조대좌가 있다. 이는 삼존상과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박락의 정도는 심하지만 사방에 백토를 칠한 채색화가 그려져 있어 당시 회화의 귀중한 사료로 주목하고 있다. 판명 가능한 부분인 좌대 아래쪽 양 측면에는 수미산 중턱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있으며, 전·후면에는 수미산을 표현한 산악과 수목 사이에 비천과 신선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에 사용된 기법이나 양식은 석가삼존불과 동일하며, 중국 북위 말의 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하나로는 주구지에 남아 있는 의 단편이다. 이것 역시 당시의 유력한 회화 사료에 의하면 야마토노아야노 마켄, 고마노 가세이, 아야노 누가코리 등 귀화인(歸化人, 백제 등의 도래인) 계통 화가의 도면을 바탕으로 자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당시의 회화는 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신구의 제반 양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완전한 회화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는 7세기 중엽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진 옥충주자 가 있다. 옥충주자는 공예 파트에서 상세히 살펴볼 예정이기에, 여기서는 회화적으로 주목할 만한 수미좌의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옥충주자의 지붕과 감실의 아래에 위치한 수미좌 각 면에는 삼존불의 설법 장면, 석가의 본생담, 수미산도 등이 옻칠과 밀타회(密陀繪, 식물성 기름에 밀타승, 즉 일산화연을 고열로 녹여서 만든 적색의 납에 물감을 섞어 문양을 그린 일종의 동양식 유화)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형식의 그림은 인도나 중국의 불교 예술로 자주 주체화된 것으로서 옥충주자에는 각기 시간을 달리하는 몇 장면이 동시에 그려졌다는 점이 특색 있다. 7세기 후반부터는 당 문화와의 교류가 왕성하게 전개되어 이 시기의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전의 초당 양식에 대응하는 새로운 양식이 탄생하게 된다. 회화는 유품과 관계가 깊기에 조각보다는 그 전개 과정을 언급하기 쉽지 않으나, 7세기 말로 추정되는 호류지의 금당벽화는 최초의 본격적인 회화 유품임과 동시에 신양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당대의 걸작이다. 이 금당벽화는 내진과 외진에 장식화가 그려져 있으나, 그 근본이 되는 것은 사방에 존재하는 사방사불정토도 4면과 소벽의 보살도 8면이다. 또한 상인방 상부의 작은 벽에는 가, 내진의 작은 벽에는 가 각각 그려져 있다. 사방사불정토도 4면과 소벽의 보살도 8면은 전체적으로 적절하고 명확한 기법과 구도, 맑은 표현 등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이미 초당 양식에 일본적인 해석과 변용을 가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카마쓰즈카 고분벽화의 발견으로 한층 더 명백해졌다. 이처럼 고구려나 당의 고분벽화, 특히 초당 회화에 보이는 군상 표현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이 있는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물의 간소한 묘사와 대담한 색면 처리, 그리고 평면화한 군상의 구성 등은 이후에 나타나는 야마토에의 특성과 상통한다. 모든 것을 바탕으로 보자면, 700년 전후의 일본 회화는 최초의 고양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조각과 건축

아스카시대는 645년에 발생한 정치 개혁인 다이카 개신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조각 역시 동일하게 구분하여 서술할 수 있다. 전기의 미술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영향이 현저하지만, 당시의 일본은 한반도 삼국시대의 영향을 지속해서 받고 있었기에 중국 미술도 삼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수용되었다. 후기에 이르면 한반도의 삼국과 함께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 또한 받으면서 기존에 잔존하고 있던 전시대의 전통이 섞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조형은 중국 수·초당까지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기] 아스카시대 이후 모모야마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각과 건축은 불상과 사원 건축 중심의 불교미술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스카시대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해인 공전년에 대해서는 538년설과 552년설로 의견이 분분하다. 기록상과 관련된 논란은 차치하고 실제로 불교가 전래된 것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도래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고분에서 출토된 3~4세기경의 불상이 새겨진 불수경이나,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가미아가타의 사당에서 발견된 중국 북위의 청동여래좌상(453)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본에 불상이 전래된 것은 6세기 이후로서 한반도의 삼국시대에 발전을 이루어낸 불교문화가 직접적으로 일본열도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을 살펴보자면 니기타현 세키야마신사에서 발견된 한반도 삼국시대의 금동불인 금동보살입상을 시작으로, 나가노현 간쇼인 금동보살반가사유상, 나가사키현 조린지 금동보살반가사유상(6세기 말), 나라현의 고노지 금동보살반가사유상(7세기 초)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6세기 후반에 해로를 통해 일본에 들어온 한반도의 삼국시대 소형 금동불이 일본 초기 불상의 기초를 다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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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교 공전년公傳年에 대한 논란

 

일본에 백제를 통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연대에 대해서는 538년설과 552년설이 있다. 538년설은 헤이안시대에 작성된 간고지의 『가람연기병류기자재장』과 『조구쇼토쿠법왕제설』의 기록을 근거로 1907년부터 통설화된 것으로, 쇼토쿠 태자를 일본 불교의 초조初祖로 하여 문화 개혁이 크게 일어난다는 중국의 무오혁운사상에 근거하여 연대를 설정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다음으로 552년설은 720년경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긴메 천황 13년(552) 백제 성명왕이 금동석가불상과 경전 등을 전했다는 기록에 의거한 것이나, 『일본서기』의 문장 중에 의정이 703년에 한역한 『금광명최승왕경』등을 인용한 부분이 확인되는 것이나, 552년이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에 있어 불교의 말법이 시작되는 해라고 여겨졌던 것에서, 552년이라는 연도도 718년 중국에서 귀국하여 『일본서기』 편찬에 참여한 삼론종의 도지가 말법사상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작위적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불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여 752년에 조영한 나라의 도다이지대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까지는 552년 공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후기] 아스카시대 후기의 조각은 텐지조(天智朝, 662-671)를 기준으로 경계가 이분되는데, 전반기는 아스카 전기 양식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는 시기이고, 후반기는 수·당 양식이 새롭게 전해져 다음 시대인 나라奈良의 선구적인 양식이 등장하는 시대이다. 전반기의 조각품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최초의 작품으로는 호류지 헌납보물인 신해년(651)명 금동관음보살입상, 658년에 제작된 오사카부간신지의 금동관음보살입상, 가는 신체의 아름다운 비례를 가진 호류지 구다라관음당의 목조관음보살입상, 호류지 헌납보물 중 하나인 병인년(666)명 금동보살반가사유상 등을 들 수 있다. 후반기인 텐지조에 이르면 630년부터 시작된 견당사 등에 의해 수용되었던 수·당 문화와 670년에 전소되어 버린 호류지의 재건을 계기로 신라와 적극적인 교류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각품들에 그 영향이 드러나게 되는데 입체감이 강조되는 사실적인 인체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특히 양 옆으로 조금 팽창된 얼굴이나 쌍꺼풀이 진 눈의 굴곡, 상반신은 길고 하반신은 짧은 체구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동안동형상'이 주를 이루게 된다. 또한 아스카 전기 이후에 제작되기 시작하는 금동불이나 목조불 외에도 건칠불, 소조불, 전불, 압출불, 석불 등의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불상이 제작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아스카시대는 불교 사원의 건축을 통해 건축양식과 기법이 함께 전래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일본 건축은 굴립주를 세우고 높은 곳에 마루를 깔며 기둥 위에는 공포를 두르지 않고 직접 대들보나 도리를 지지하는 방식인 반면, 사원 건축은 평평한 바닥에 초석을 두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기둥 위에 공포를 올리는 방식이었기에 아스카시대에는 이러한 건축양식이 성행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원 건축의 유구는 641년에 시작하여 685년에 완성한 나라현 야마다데라의 가람으로, 1975년에 시작한 발굴조사에 의해 탑, 금당, 강당, 회랑이 상당히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상 건축물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는 7세기 말에 재건되었던 호류지 금당과 오층목탑, 중문 등이 있다.

 

3. 공예

아스카시대는 불교가 전래된 시기이기에 금속공예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588년에 아스카데라가 건립될 때, 한반도로부터 공예의 기술이 다수 전해지게 되었다. 공예미술의 기반을 정립시킨 공인의 제도 또한 몬무천황(697-707년 재위)의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 시기의 금속공예는 불상과 조금彫金, 사리용기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불상은 주로 납형주조로 제작되었고, 조금彫金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류지 헌납보물인 금동관정번이 있다. 이 외에도 칠기공예가 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류지의 옥충주자가 있다. 본체는 지붕에 치미를 가진 궁전 부분, 수미좌, 대각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칠과 녹칠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냈고, 특히 기단의 측면에는 투조된 금동금구 밑에 옥충(비단벌레)의 날개가 깔려 있어 매우 정교하면서도 귀중한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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