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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일본미술사

일본 고대 가람배치

by cloudy_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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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시대의 대표적인 대사원인 도다이지와 고후쿠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탑보다는 금당을 우선시하는 커다란 변혁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석가의 사리를 안치하였던 탑을 중심으로 한 배치 형식에서 불상을 안치하고 이를 모신 금당을 중심으로 한 배치로 변화되었는데, 이것은 신앙의 형태가 석가신앙에서 대승불교의 다불신앙으로 완전히 이행된 것을 의미하는 바이다. 588년에 백제로부터 온 승려와 와박사, 화공 등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호코지(아스카데라)는 백제에서 넘어온 석가사리를 안치한 탑을 중심으로 두고 북·동·서의 세 곳에 금당을 각기 두었는데, 회랑이 중금당 뒤쪽으로 연결되어 세 금당을 에워싸고, 그 바깥쪽에는 강당을 배치하는 형식인 '일탑삼금당·외강당식'을 띠고 있다. 이러한 배치 형식은 고구려의 평양 정릉사지(5세기 말)와 청암리 폐사[金剛寺址, 498], 백제의 부여 군수리 폐사(6세기 후반), 신라의 경주 황룡사지(553), 경주 분황사(634) 등의 가람 배치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일탑삼금당·외강당식의 가람배치는 중국 한대의 천문점성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중국이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서 금당과 탑이 분리되고, 탑을 가람의 중심에 두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탑 뒤편에 왕궁의 태극전과 비슷한 형태의 금당을 배치하는 형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원으로는 북위의 낙양 영녕사(516)인데, 이 사원은 기본사상을 일탑삼금당·외강당식과 같이 한대의 천문점성사상에 두면서도, 삼궁을 하나로 통합하고 북쪽에 중궁을 두는 간략형, 즉 탑의 후방부분에 금당을 배치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일한 가람배치를 가진 사원으로 백제의 공주 대통사지(529)와 부여의 능사지(567), 정림사지(7세기 초)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사원의 형태가 탑과 금당을 세로로 나열하는 '일탑일금당·내강당식'의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형식의 가람배치가 백제를 경유하여 아스카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탑일금당·내강당식의 배치를 보이는 대표적인 아스카시대의 사원으로는 오사카 시텐노지(593)와 호류지 와카쿠사 가람(607)을 들 수 있는데, 이 사원들의 가람배치를 보면 회랑의 연속선상에 강당이 있고 회랑 안쪽에는 탑과 금당을 세로로 나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야마다데라(山田寺, 681년 발원)는 회랑의 안쪽에 탑과 금당을 세로로 나열했으며, 그 바깥쪽으로 강당을 두는 '일탑일금당·외강당식'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이칸타이지(大官大寺, 7세기 후반)의 경우 회랑의 연속선상에 금당을 두고 그 안쪽에는 탑을, 바깥쪽으로는 강당을 두는 '일탑일금당·외강당식'의 가람배치를 가진다. 이러한 예시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일탑일금당·외강당식이 아스카시대에 가장 유행한 가람배치의 형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해 보자면 일본에는 초기에 일탑삼금당·외강당식으로 전래되었고 다음으로 일탑일금당·내강당식이, 마지막으로는 일탑일금당·외강당식이 들어온 것이다. 특히 아스카시대에 가장 유행했던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한반도의 삼국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인 사원 조영의 계획이 삼국, 특히 백제에서 파견된 승려나 장인, 도래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사원은 모두 석가를 본존으로 삼아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을 중심 예배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탑을 석가의 진신眞身으로, 금당을 석가정토를 재현한 불국토로 보는 신앙 형태를 시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구다라오데라(639)와 7세기 말에 재건된 호류지는 회랑 바깥으로 강당이 위치하는 일탑일금당·외강당식의 배치 형식을 취하면서도, 위의 사원들과는 다르게도 회랑 안쪽에 탑과 금당을 가로로 나열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탑과 금당을 동 · 서로 나열하는 배치 형식에서 석가사리신앙이 약해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동일한 형식을 보이는 사원이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으나, 당의 도선(道宣, 596-667)이 저술한 『계단도경』은 남북으로 금당과 탑을 세로로 나열하는 형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간 자장이 창건한 양산 통도사(646)는 대웅전 뒤쪽에 불사리를 안치하는 금강계단을 배치하고 있다. 탑 앞에 금당을 두는 형식이 7세기 전반 당에서 행해졌던 것이나 7세기 후반에 들어서 금당이 가람의 중심에 배치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석가사리신앙에서 대승불교의 다불신앙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나타난 이러한 가람배치가 630년부터 시작된 견당사 파견에 동행한 승려들에 의해 당으로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회랑과 금당이 나란히 늘어서며, 회랑 안에 또 하나의 금당을 탑과 가로로 나열하고 바깥으로 강당을 두는 '일탑이금당·외강당식'의 가람배치를 가진 가와라데라(661년경)는 탑과 금당을 세로로 나열하는 형식과 가로로 나열하는 형식의 복합형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682년경에 창건한 모토야쿠시지는 시텐노지의 가람배치에서 탑을 쌍탑으로 변형시킨 '이탑일금당·내강당식'의 사원이다. 이 사원에서 처음으로 금당 앞에 2개의 탑이 서 있는 형식의 가람배치가 등장하고, 본존 또한 석가가 아닌 약사여래로 변경된다. 이러한 이탑일금당·내강당식의 배치 형식은 중국 남북조시대에서도 존재했었으나 당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한 것으로 여겨지며, 7세기 후반에 석가사리신앙에서 대승불교의 다불신앙으로 사상적 이행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는 가람배치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가람배치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751년경)를 정점으로 하여 통일신라에서도 유행한 형식이다. 이처럼 석가신앙에서 대승불교의 다불사상으로 변화되는 경향이 잘 반영되어 발전된 형태로 건립된 사원이 바로 고후쿠지와 도다이지이다. 고후쿠지는 호코지의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여 2개의 탑을 밖으로 내었고, 도다이지는 노사나불을 본존으로 삼아 모토야쿠시지의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여 2개의 탑을 강당과 함께 회랑 바깥으로 세웠다. 더욱이 다이안지에서는 탑을 남쪽 대문의 바깥에 세우는 등의 형태는 나라시대의 국가불교가 진호국가의 성격이 강한 대승불교로서의 신앙이 중심되었고 구체적인 공덕이 없는 석가신앙은 점차 약해져 갔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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