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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일본미술사

동양미술사 - 일본(에도시대)

by cloudy_ 202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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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는 1615년의 오사카성 함락(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부터 도쿠가와 막부가 폐지되고 정권이 메이지 정부의 천황에게 돌아간 메이지유신(1868) 이전까지를 에도(지금의 도쿄)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에도에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던 1603년부터를 에도시대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1. 회화

모모야마시대의 회화가 지닌 명쾌함은 에도 막부의 체제가 정립됨에 따라 점차 없어지고 간에이기(1624-1643) 경과 후 회화의 양상은 태평기의 오락성을 띠게 되었다. 즉 약 2세기 반에 걸친 도쿠가와 막부의 문치주의와 쇄국이 가져온 평화로운 시대로 인해 에도시대는 다양한 화가와 화파가 역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등장하는 이른바 회화의 황금기가 할 수 있다. 또한 교토뿐만 아니라 신흥 도시인 에도(도쿄)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에도시대는 여러 화파가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흥하였기 때문에 시대적 구분이 용이하지 않다. 따라서 시기별 주도적인 화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전기] 에도 전기는 모모야마시대의 방대한 풍격이나 웅장함은 사라지고, 온화하고 지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화파로는 막부의 어용화사로서 지위를 굳건히 하며 세력을 넓힌 에도 가노파이다. 초기 막부에 의한 모모야마풍의 건축은 장엄함과 화려함이 증대하였는데, 이들 건축의 장벽화 제작을 주로 담당했던 것은 에도 가노파의 중심인 가노 탄유(1602-1674)였다. 그는 에도와 교토를 빈번하게 오가며 막부와 궁정, 그리고 여러 다이묘의 성곽과 저택을 비롯한 다양한 사원의 장식을 담당하였고, 소품류까지 이르렀기에 거의 몇천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1634년 나고야성 상락전의 <설중매죽유금도후스마>에 시도된 담백하고 소쇄한 신양식은 에도 회화사에서 중요한 역할로서, 이후 가노파의 기초 양식이 되었다. 다음으로 진정한 의미로서 야마토에의 근세적 부흥을 이룩한 다와라야 소타쓰(?-1640년경)가 창시한 린파가 있다. 모모야마 후기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소타쓰는 서서히 이름을 알려 법교에 이르렀으며, 고미즈노 천황(1611-1629년 재위)과 관련된 제작에 참여함과 동시에 대화면 장병화 제작에도 진출하였다. 그의 화업의 뚜렷한 특징은 고전 야마토에의 근세적 해석에 따른 풍부한 자연묘사, 그리고 정교한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새로운 장식화 창조에 있다. 한편 무로마치 말기와 모모야마시대의 풍속화는 무가의 부녀자나 일반 서민이 집단으로 유락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었지만 에도시대에는 집단보다는 몇 사람 혹은 한 사람의 여성을 주제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 화가라 불리던 마치에시가 제작을 주도했으며,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의 인물을 그렸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시바이나 유녀라는 특수 계층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표현기법도 배경을 생략하고 관능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퇴폐적인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다. 이외에도 중국의 남송대 화가 양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색적 화가로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가 있다. 그는 감필체로 수묵화를 주로 그렸으며, 대표작 중 하나인 <가마우지도>는 대상을 견고하게 관찰하면서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예리한 기백이 담겨 있다.

[중·후기] 에도시대의 중기에는 남화南畵가 크게 유행한 것이 특징이다. 에도시대에는 막부의 문치주의 영향으로 인해 유교가 한층 성행하고 교양인인 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중국 취미가 널리 유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세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남화인 것이다. 이는 중국 원말 4대가를 대표하는 남종화 양식과 중국 문인화의 이념을 기본으로 하는 하나의 장르로서 이해되고 있다. 즉 중국 문인화가 화가의 신분에 의해 분류된 것이라면, 일본 남화는 그림 양식에 의해 분류한 것으로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진다. 18세기에 이르러 성행하였던 에도 남화의 선구자로는 기온 난카이(1676-1751)와 다양한 취미를 지닌 풍류인이었던 야나기사와 기엔(1704-1758), 하이진(하이쿠의 시인)이기도 한 사카키 햐쿠센(1697-1752) 등이 있다. 앞선 선구자들의 업적 위에 일본 남화를 정립한 인물은 이케노 다이가(1723-1776)와 요사 부손(1716-1783)이다. 대표작으로는 1771년 다이가의 나이 49세에 부손과 합작한 <십편십의도>가 유명하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로는 교토와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조닌들의 지지를 받아 사생화를 그린 화가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마루야마 오쿄(1733-1795)가 있다. 그는 타고난 비범한 화기에 머물지 않고 일생을 사생에 주력하여 강력하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을 남겼으며, <등화도병풍>과 <설송도병풍> 등은 오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쓰케타테 등 다양하고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하였지만, 점차 과도한 기법 활용으로 사실성은 옅어지고 장식성을 띤 감상화를 주로 제작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18세기 후반에 교토화단의 이채로운 화가로 알려진 이토 자쿠추(1716-1800)는 린파의 장식성과 남화풍의 표현성을 일체화한 사실주의적 장식 양식을 만들어냈고, 소가 쇼하쿠(1730-1781)는 소가파 회화의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을 그렸기에, 이들을 교토 기상화파라고도 부른다. 이외에도 18세기 초기의 육필 미인화의 대표 화가인 가이게쓰도 안도(생몰년 미상)가 있다. 안도의 가이게쓰도 공방에는 많은 화가가 소속되어 있으며, 주로 육필화를 제작하였지만 판화도 담당하였다. 그들은 육필화와 판화 두 분야에서 동일 구도로 홀로 서 있는 단독 유녀의 모습을 화면 가득 제작하였다. 18세기 말의 덴메이(天明, 1781-1789)와 간세이(1789-1801) 연간은 니시키에의 황금시대로, 다양하고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뛰어난 화가가 배출되었다. 1790년경 미인을 오쿠비에라는 새로운 형식에 도입한 화가로는 기타가와 우타마로(1753-1806)가 있다. 그는 판화업자인 쓰다야 주자부로(1750-1797)와 함께 <부인상학십체> <가센고이노부> 등 오쿠비에 연작물을 발표한다. 이외에도 농염하고 퇴폐미가 넘치는 미인 오쿠비에가 에도 말기에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우키요에 미인화가로는 게이사이 에이센(1790-1848)과, 우타가와 도요쿠니로부터 이어받아 야쿠샤 니카오에와 <당세미인합> 등의 미인화를 주로 그린 우타가와 구니사다(1786-1864)가 있다. 에도시대 후기 우키요에 풍경화를 상징하는 화가로는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가 대표적이다. 그 중 에도시대 중기 이후부터 활약한 호쿠사이는 서양화의 음영법이나 원근법을 도입하였고, 다소 과장되지만 힘이 있는 필법을 구사하였다. 특히 에도시대 후기에는, 관서 지역에서 활동한 남화가인 다노무라 치쿠덴(1777-1835)과 관동 지역에서 활동한 다니 분초(1763-1841)가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양풍화 분야는 이전의 남만미술에 이어 1720년 비종교성을 특색으로 한 제2의 양풍화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는 장군 요시무네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을 제외한 모든 양서를 해금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로서 작용하였다. 양풍화를 그린 화가 중 아오도 덴젠(1748-1822)은 에도 명소를 그리는 한편, 유채화로 <아사마야마진경도병풍>과 같은 대작을 남겼다.

 

2. 조각과 건축

에도시대 전기에는 에도 막부에 중용된 교토 시치조 불소의 불사들에 의해 견실한 조형 활동이 전개되었다. 고쇼의 아들이라 전해지는 고유가 제작한 교토 지온인 목조도쿠가와히데타다좌상(1619)과 도치기현 닛코도쇼구의 석가·대일·다보여래 등의 불상군(1631) 등과 같이 가마쿠라 조각의 전통을 부활시킨 뛰어난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중기에 이르면, 전적으로 직업 불사들에 의한 조형 활동만이 행해졌기에 현존하는 조각은 상당히 많지만 생명력을 상실한 형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을 이루게 된다. 이로 인해 직업 불사가 아닌 신앙심에 근거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도 에도시대 조각의 특징 중 하나이다. 다만 이들의 작품은 불사들이 제작한 전통적인 조각 양식과는 달리 초심자풍의 기법으로 제작되었기에 조형성이나 기술 면에서는 수준이 극히 떨어지는 것이 많다. 그 다음으로 사원과 신사 건축 조영을 보면, 에도시대 초기에는 조직화된 기구 속에서 척도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목재의 제작 기법과 크기도 정해지게 된다. 에도 건축은 세부 구조의 장식조각에 집중하였기에 조각으로 넘쳐나는 화려한 건축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기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황폐화된 여러 사원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중창·중건에는 전통에 따른 일본 양식과 선종 양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일본 양식과 선종 양식이 혼합된 근세 절충 양식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양식은 후세에까지 계승된다. 이처럼 에도시대에는 사원과 신사의 재건이 성행하는데, 대표적인 신사 건축으로는 교토 묘신지 법당, 교토 가모와케이카즈치신사의 사전 등이 있다.

 

3. 공예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사기장朝鮮沙器匠을 강제로 납치하고 이들을 가라쓰, 이마리를 거쳐 아리타에 안착시켜 백자를 생산하게 하였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든 사람은 조선사기장인 이삼평으로, 그는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자토를 발견하여 1610년에 백자 생산에 성공한다. 이처럼 조선사기장에 의해 생산된 아리타의 조선식 백자 및 가마의 생산방식은 회유도기와 백자를 한 가마에서 굽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조선사기장이 주축이 되어 가마를 열고 생산하였던 조선식 백자요지가 현재 아리타시를 중심으로 이마리 등에 다수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가마로는 하라아케요, 고미조요, 텐진모리요 등이 있다. 여기서 아리타 지역에서 생산된 17세기의 도자기는 이마리 자기, 고쿠다니 자기, 가키에몬 자기, 나베시마 자기로 나눌 수 있다. 조선사기장이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한 것은, 1680~1690년대에 유럽으로 도자기를 수출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가키에몬 색회자기 제작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17세기에는 아리타 지역이 아닌 교토 지역에서도 화려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이른바 교자기라고 불리는 이 도기는 금채 등 문양이 화려하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노노무라 닌세이, 오가타 겐잔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화려한 교토의 색회도기는 에이센(1767-1833), 모쿠베(1767-1833), 호젠(1795-1854) 등에 의해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풍의 다양한 도자기 제작으로 이어져 교토의 도시 생활에 적합한 공예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후 일본 근·현대의 화려한 도자기의 토대를 만들었다. 에도시대의 칠기로는 린파의 혼나미 고에쓰, 오가타 고린이 대표하며, 고린의 대표작인 <팔교마키에나전연상>은 뚜껑 부분에 제비붓꽃을 마키에로 표현하고 일부 꽃 부분은 야광패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금속공예에서는 일반인의 수요가 늘어났고, 종의 주물 제작이 특히나 활발하게 이루어져 주물의 기술이 발전하였다. 납형 주조로 다양한 형태의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이와 같은 사실적인 형태의 주조품들은 에도시대 후기에 유행하여 메이지시대와 근대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에도시대에 널리 보급된 주조품은 에카가미가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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