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1573년부터 오사카성이 함락된 1615년까지를 모모야마시대라 명명하지만, 미술사에서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던 1603년의 전년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회화사에서는 양식의 연속성을 중시하기에 1614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학자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한 1568년부터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 부자가 정권을 장악한 1602년까지로 보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오다 노부나가가 거주한 오우미 지역의 아즈치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주한 교토 후시미성의 지명인 모모야마를 따서 아즈치모모야마시대라고 부는 경우도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천황을 보좌하는 중책으로 정치의 실권자)가 된 1585년부터 그의 친자인 히데요리가 정권을 유지하던 약 20년간을 한정하여 모모야마시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 회화
모모야마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을 비롯하여 히데요시의 주라쿠다이, 오사카성 등의 성곽이나 궁전을 장식하는 장병화가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장병화의 성행은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 사회적 배경에 의한 것으로 무사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장대한 성곽을 조영하여 다량의 장벽과 병풍, 그리고 후스마 등을 매우 장엄하게 제작하였다. 화려한 금박지에 두꺼운 채색을 한 금벽농채화(또는 다미에), 화조화와 풍속화 등 장식적이고 감상적인 회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이들 장병화는 대규모로 화려하게 제작되어 사원이나 개인의 저택에까지 보급되었던 시대이다. 한편 야마토에 전통을 중시하여 보다 아름다운 화풍을 선호하였던 궁정 귀족 및 이들과 연관된 상류 서민인 마치슈도 금벽장병화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히데요시에 의해 무사, 농민, 조닌 등 계급을 확연하게 구분시키면서 사회적으로 자리잡게 되자 점차 약화되었다. 모모야마시대의 미술은 대부분이 실내 장병화로서 대규모 제작이 되었기에, 능력과 개성을 갖춘 뛰어난 화가를 중심으로 그 화가가 소속되어 있는 화파의 화가들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강하게 추진한 화파로는 가노파가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가노 에이토쿠(1543-1590)가 있다. 가노파 이외에도 하세가와 도하쿠, 가이호 유쇼, 운코쿠 도간, 소가 초쿠안 등이 각각의 유파를 형성하고 가노파를 의식하며 모모야마시대의 양식을 형성하였다. 모모야마시대는 현세적이고 낙천적인 시대조류를 타게 되는데, 이는 풍속화를 융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가노파가 그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시대 양상이 장벽화에 그려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가노 히데요리의 <다카오관풍도병풍>을 통해 사계절의 그림인 시키에, 1년 12달의 그림인 쓰키나미에의 부수적인 배경에 불과하던 풍속묘사가 주제로 부각되는 풍속화 성립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모모야마 화단의 이색 분야였던 양풍화는 다수의 작품이 남아 있지만 작가는 전해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의 신자였던 야마다 유에몬과 노부가타 등의 이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양풍화는 예수회가 규슈 나가사키에 설치한 신학교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인 신도에게 성화상의 서양화 제작 기법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남만병풍>이 있으며, '남만'이란 나가사키항港을 통해 일본에 온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유럽 지역을 지칭한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다이묘에 의해 교화 수단의 목적으로 이국적 취미가 넘치는 세속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태서왕후기마도병풍> 등이 있다. 일본 미술에 유입된 유럽 예술의 영향은 1637년에 일어난 시마하라의 난 이후 그리스도교 탄압과 1639년 쇄국령에 의해 점차 감소하였으며, 양학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 발흥하게 된다.
2. 조각과 건축
모모야마시대에는 불상 조각이 점점 창조적인 활기를 상실하면서 쇠퇴하게 되고 이후에도 부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유품의 양, 특히 제작자와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기준 작품이 상당히 많고 작품의 분포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지만, 조형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극히 적으며 새로운 양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교토의 시치조 불소만이 활동을 이어가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교토를 중심으로 도지, 렌게오인, 다이고지 등에 있던 오래된 불상들의 수리를 담당해 온 시치조 불소의 고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 부자의 발원으로 1589년경에 나라 도다이지 대불을 모방하여 만든 교토 호코지 대불의 조영과 1602년부터 1604년에 걸쳐 재건된 교토 도지 금당의 목조약사삼존좌상의 조영을 통해 운케 양식의 부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약동감과 생기가 결여되고 의문선에서도 번잡함을 가지는 등 전체적으로 둔중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 실제적인 조형성에 있어서는 운케 양식과 완전히 다른 작풍을 보이고 있다. 또한 초상 조각에 있어서도 고세가 제작한 교토 소켄인 목조오다노부나가좌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남아 있으나 조각보다는 인형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음으로 모모야마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은 새롭게 권력을 잡은 무가武家와 깊이 관련된 성곽과 주택, 사원의 객전 등에서 완성된 서원즈쿠리 건축 형식, 그리고 다실茶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란에 의해 황폐화된 사원과 신사의 재건활동도 성행하였다. 먼저 일본의 성곽을 보면, 에도시대의 군학자들은 성곽이 위치한 지형에 따라 성곽의 종류를 산성과 평산성, 평성의 세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대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세워진 성들은 자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산 위에 세운 산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산성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가 1576~1579년에 걸쳐 세운 아즈치성이 대표적인 예이자 근세 성곽의 중심이 되었다. 아즈치성은 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과 함께 소실되지만, 그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교토 후시미성 등 대규모 평성식 성곽을 조영했다. 모모야마시대 말기가 되면 전란이 줄어들면서 히로시마성, 도쿄의 에도성, 교토의 니조성 등 평지에 세우는 평성도 조영하게 된다. 이후 에도시대에는 증축이나 재건 등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조영만 행해질 뿐,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주목할 만한 성곽의 조영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무가의 주택과 함께 사원의 객전이나 방장의 건축에는 무로마치시대 중기에 성립된 서원즈쿠리 건축양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모모야마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전국시대에 극히 황폐해진 사원과 신사의 재건이, 정치의 실권자인 간파쿠나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아 활발히 행해졌다. 이 밖에도 기존 건물을 이축하는 등의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3. 공예
모모야마시대는 일본 국내가 통일되면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하여 해외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공예의 발전에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예술 애호가 많은 다이묘들에게 영향을 주어 모모야마시대의 미술은 새로운 전개 양상을 보이는 한편, 금·은 생산량의 증가로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미술과 공예의 제작이 더욱 활발해졌다. 도자기는 초기에 다도의 성행으로 다기가 주로 생산되었다. 다기는 소박한 기형을 가진 것이 특징이며, 고려 및 조선의 다완과 중국 남송의 흑유다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센노리큐의 영향으로 다도는 일대 혁신을 맞이하게 되며, 나아가 이 시기는 일본의 다도에서 조선다완의 숭상이 극치에 달한다. 이러한 사실은 야마노우에 소우지가 조선다완을 천하의 제일이라고 평가한 『야마노우에 소우지기』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모모야마시대는 일본 동부의 미노 가마에서 기세토, 시노, 오리베의 다양한 도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일본 서부의 비젠과 이가 도기는 물레로 형태를 만든 다음 인위적으로 비틀어, 뾰족한 도구로 간단한 직선이나 곡선의 문양을 시문하였다. 이러한 비젠과 이가의 도기는 대부분 다기로 주문자의 의도를 반영하여 만들었으며, 일부는 작가나 주문자의 이름이 남아 있어 주관적인 추상미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황금 다실과 다기를 만들어 상당량의 황금이 사용되었지만 금속공예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소강상태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야마시대에는 다도가 유행했기에 유가마인 교가마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모모야마시대의 새로운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고다이지마키에와 남만칠기가 있다. 이 중 남만칠기는 1639년의 쇄국정책 이후부터 17세기 후반까지 포르투갈,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수출된다. 그리스도교와 관련 있는 기형을 가지며 성감, 책받이 등이 있고, 문양으로는 마키에, 나전, 상어 표피 등을 이용한 누각인물도, 누각산수화 등으로 다양하고 빽빽하게 시문되었다. 일부의 나전 문양은 조선시대 전기(15-16세기)의 나전 문양을 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으로 수출된 일본의 칠기는 그 양이 막대하여, 이후 유럽에서 자포니즘Japonisme을 형성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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