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정권을 전달받은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기구를 수립한다. 그리고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하고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며 연호를 메이지로 정했다. 전근대적인 천황제를 바탕으로 하여 유럽의 근대적 국가 제도를 추구한 메이지시대는 오늘날 일본 체제와 제도의 근간을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미술사에서는 일본에 서양미술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로서, 6세기 불교 미술의 전래 이후 가장 급격한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1. 회화
일반적인 근대회화의 시작이라고 하는 메이지시대 일본 화단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화와 서양화의 등장이다. 일본화라는 명칭이 확립된 시기는 메이지 10년대로 서양화, 즉 양화가 회화의 한 영역으로 확립된 때부터이다. 즉 메이지시대 이전에는 회화에서 유파나 양식에 따라 구분을 지은 것과는 달리, 서양의 미술에 영향받은 양화와 이에 대항한 새로운 국화國畵인 일본화로 크게 분류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미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각지의 남화가들이 급부상하였고, 남화를 선호하는 일반인층도 상당수 증가하였다. 이는 메이지 초기에 유행한 한학·한시로 인해 비전문가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남화가 지방 지주와 메이지 정부 고관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회화개혁운동을 실시한 어니스트 페놀로사(1853-1908)의 등장으로 일본화에 대한 인식이 촉발된다. 특히 1877년과 1881년에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양화의 미숙함이 지적되어 양화와 남화에 대한 배척의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정부는 1887년에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를 설립하였다. 한편 일본화 성립의 지주 역할을 한 오카쿠라 덴신(1862-1913)도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덴신은 『동양의 이상』과 같은 저서를 남긴 문화사상가이자 미술행정가로서, 도쿄대학 재학 당시 스승이었던 페놀로사와 함께 일본화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다이쇼시대(大正, 1912-1925)에 이르러서는 좀 더 개성적이며 자유롭고 다채로운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14년에는 다이칸, 간잔 등이 문전을 탈퇴하여 신시대 동양미술의 유지와 개발이라는 덴신의 정신을 이상으로 하는 일본미술원을 재흥시켰다. 일본미술원은 해마다 파격적이고 과감한 화풍의 문제작을 전시하고 유망한 신진작가를 배출하여 신일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해외순회전을 개최하는 등의 문전에 대항하는 재야단체로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1935년에는 일본미술원이 개조되면서 미술계가 한차례 통일되었다. 그러나 일본미술원은 물론 관전도 일본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보다는 형식을 계승하는 데 급급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과 이후 태평양전쟁 등이 발발함에 따라 혁신적인 업적이나 발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전후에도 종래 일본화에 대한 대가들의 근본적인 개혁의 의지나 새로운 그림의 탄생을 더는 볼 수 없다.
일본 근대의 양화는 서양화를 흡수하여 탄생한 '일본적 양화'로서 일본화와는 크게 구별되는 의미를 지닌다. 일본 근대 양화의 출발점은 1858년 막부에 의해 개설된 번서조소에서 시작되었다. 메이지시대 초기에 양화풍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미약하나마 양화연구가 착실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1887년 무렵 외국에서 유학한 양화가들이 잇따라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이들 신해외유학파와 아사이 추 등이 1889년에 메이지미술회를 결성한다. 메이지미술회는 야니파 혹은 구파舊派라 칭하며 일본 최초의 양화단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들에 대비되는 신파新派로는 구로다 세이키(1866-1924)가 1896년 후지시마 다케지(1867-1943), 오카다 사부로스케(1869-1939) 등의 신인들과 함께 결성한 백마회이다. 메이지 30년대에 이르면 백마회와 메이지미술회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화단의 양분이 시작되었다. 그 후 1901년에 메이지미술회는 해산하였고, 나카무라 후세쓰(1866-1943) 등은 유럽으로 건너가 장 폴 로랑스의 역사화를 습득하고, 다음 해에 태평양화회를 창립하여 백마회와 대립하였다. 1907년 문전에서는 백마회와 태평양화회 화가들을 중심으로 양화 화단의 아카데미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11년에 백마회는 결국 해산되었고 1912년에는 관전계 화가들이 광풍회를 조직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그것이 이어지고 있다. 1923년 이후에는 포비즘, 입체파, 미래파, 표현파, 구성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유럽의 새로운 미술운동이 대거 유입되어 젊은 양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신미술운동은 이 무렵 부활한 급진적인 사상운동과 더불어 화단 일부에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한편 사회주의 운동의 일약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한 제전이 침체를 거듭함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35년 제국미술원 기구를 개편하여 재야의 유력한 미술가를 영입하고, 무감사 등의 특권을 크게 축소하여 제전의 귄위 회복을 시도하였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중 미술보국회가 만들어져 미술가들은 전시 제국주의의 홍보에 동원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미술은 물론 초현실주의, 추상파 등의 전위예술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 도달하면 일본 미술계에서는 전쟁화와 같은 전쟁 관련 작품이 대다수였다.
2. 조각과 건축
1868년에 메이지시대의 신정부는 에도 중기부터 일어난 유교와 국학을 기본으로 하는 국수주의를 바탕으로 신도를 국교로 정하는 신도국교화정책을 펼치고, 외래종교인 불교와 습합되어 믿어지던 민족종교인 신도를 분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신불분리령을 내린다. 일본에서 8세기부터 불교를 주된 종교로서 정립된 신불습합의 전통은 신사神社에는 신궁사라는 사원을, 불교 사원에는 신사를 두어 가람을 수호하게 하는 등 고유의 신들이 불교에 귀의하는 형태로 불교와 신도가 하나의 신앙체계로 유지되어왔다. 특히 에도시대가 되면 불교가 지배층뿐만 아니라 서민의 생활에까지 깊게 관여하게 된다. 1635년경 전 국민이 근처에 있는 사원에 신자로 귀속되고, 1700년경에는 집집마다 불단이 안치되며, 승려가 장례식을 주도하게 되고 무덤 또한 불교 사원이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서민들에게 전가하면서, 경제적인 착취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신정부의 신불습합 전통에 대한 국수주의적인 반발이 일어나게 되어 결국 신불분리령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신사의 경내에 있던 신궁사의 건물과 불상은 파괴되거나 태워지고 불교에 대한 탄압도 심해지며 건축과 조각에 대한 수요가 극심하게 줄어든다. 메이지시대 초기에 시작된 불교 탄압은 일본 조각계와 더불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오던 불사와 목수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준다. 불상이 폐기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 속에서 불사들은 부업으로 하고 있던 인형이나 공예품 등의 상아조각으로 전업하는 사태가 늘어났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1876년에 공부미술학교를 창설하여 서양의 조각 기법을 중점적으로 지도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인해 1882년에 폐쇄하고 만다. 이로 인해 1889년에 도쿄미술학교를 개설할 때에는 조각과에서 서양조각이 제외되고 목조조각만이 채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목조조각이 부활하고 전통적인 목조조각에 서양적 사실 표현을 도입한 조각가가 많이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조조각의 일본 양식을 정립한 조초의 후손이라 자칭한 교토의 다나카 몬아와 그의 아들 다나카 분야 등이 있다. 이처럼 도쿄미술학교에 소조과가 신설되면서 전통적인 목조기법을 답습하던 다카무라 고운과 그의 제자인 요네하라 운카이(1869-1925) 등도 서양식 조각에 자극을 받았다. 또한 메이지시대 미술계의 지도자였던 오카쿠라 덴신에 의해 고사사보존법이 공포된 이듬해인 1898년에 창립된 일본미술원은 국보의 수리를 목적으로 하는 제2부(현재의 재단법인 미술원)를 1901년부터 나라에 두고, 니노 주노스케 등에 의한 문화재의 보존과 수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상 유지'라는 수복 이념으로 인해, 화제에 약한 목조 재질의 건축과 조각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현상 보호를 목적으로 폐쇄되거나, 수장고 혹은 공공기관으로 옮겨지는 국가적 지도가 행해지면서 법당, 불상, 신상 등의 종교 건축과 종교 조각이 신앙이 대상이 아닌 문화재나 예술품으로 인식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근대화를 국시로 내걸고 서양화를 추진하던 메이지시대의 정부는 영국인 요시아콘더와 같은 외국인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벽돌과 석조를 사용한 서양식 건물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교회당이 세워졌고, 프랑스 파리의 외국선교회 신부의 설계를 바탕으로 일본의 목수들에 의해 건립된 나가사키현 오우라천주당 등이 대표적인 건축이다. 이후에는 노비대지진(1891), 쇼나이대지진(1894), 사쿠라지마대지진(1914) 등을 경험한 일본이 지진에 약한 특징을 가진 서양식 건물에 대한 내진성에 관심이 커진다. 벽돌로 건립한 대규모 건축의 마지막을 장식한 구舊 나고야공소원 지방재판소 청사는 네오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하고 있으나,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을 병용한 구조를 하고 있어 내진을 건축에 도입한 초기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나고야은행 본점과 같은 철골이나 철근콘크리트조에 의한 내진·내화 건축이 건립되기에 이른다.
3. 공예
메이지유신은 사회·정치 및 경제의 체계와 조직에 혼란을 가져왔고, 사회 전반에 걸친 보수적인 성향이 만연하여 공예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에 그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메이지정부는 산업진흥정책을 추진하며 1873년 빈 박람회에 공예품을 출품하는 등 공예 발전의 기틀을 제공한다. 또한 일본에서 생산된 공예품을 제도적인 차원으로써 판매하기 위해 기립공상회사를 설립하고 뉴욕과 파리에 그 지점을 세워, 메이지시대에 제작된 공예품 수출전초기지를 마련한다. 메이지시대의 공예는 도자기와 염직의 분야가 전반적으로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과학기술을 이용한 생산의 합리화가 시도된 반면, 금속공예에서는 생산의 합리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메이지시대의 도자기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중국 취미'의 영향을 받아 청대 도자기를 모델 삼아 만든 수출 도자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형의 대부분은 화병으로, 대표적인 도자기로는 사쓰마 도자기가 있다. 금속공예에서는 특이한 점으로, 도쿄미술학교에서 배운 공인들이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고전미술을 연구하여 예술성이 높은 공예품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일본 근대금속공예가인 가토리 호쓰마는 고대 금속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나의 틀을 통해 여러 가지 동일한 형태를 만들거나 부분적인 것을 수정하는 등 주조에 바탕을 둔 작품을 여러 제작하였다. 다음으로 근대칠기공예는 낙랑칠기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한 롯카쿠 시스이와, 한국과 중국의 칠기에 대해 연구하며 일본 내의 칠기품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행한 적이 있는 마쓰다 곤로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근대유리공예의 기초는 색유리를 중심으로 유리의 유동성을 잘 살린 작품을 제작한 이와타 도시치(1893-1980)와, 평생 투명유리의 장점을 살린 작품을 제작한 가가미 고조(1896-1985)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메이지시대의 공예는 부국강병을 위해 국가가 주도한 산업적인 성격이 강하고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이쇼시대가 되면, 일본의 공예가 산업적 공예에서 벗어나 개인의 미의식을 반영한 예술품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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