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사학/인도미술사

동양미술사 - 인도(힌두교 신전 : 나가라 형식)

by cloudy_ 2024. 3. 18.
반응형

1. 힌두교 신전의 조형원리(700-1300년경)

엘레판타나 데오가르에서 볼 수 있듯이 힌두교 신전의 성소는 평면이 보통 정방형으로 설계되었다.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세계를 정방형의 도형으로 시각화하였고 그 기원은 베다시대의 제단 형태에까지 올라간다. 굽타시대부터 이러한 도형이 신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런 성스러운 도형을 '바스투-푸루샤-만다라vastupurusamandala'라고 불렀는데, '바스투'는 건물, '푸루샤'는 인간, '만다라'는 도형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푸루샤는 세계 창조 과정에서 최초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 태초의 인간을 말한다. 이 인간의 각 부위가 정방형 도형의 각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정방형 도형의 가장 중앙의 공간이 신전 성소의 내부를 이룬다. 이곳은 때에 맞춰 행해지는 의식에 따라 신이 현현하는 공간으로, 그 가능성을 상징하는 무르티(신상, 시바의 경우에는 링가)가 놓인다. 이 방을 가르바그르하(자궁의 방)라 부르는데, 매우 두꺼운 벽으로 둘러싼다. 외벽에는 대략 내부 방의 폭만큼 면을 내어 그곳에 부조를 새겼다. 이 부조들에는 성소에서 숭배되는 신과 관련된 신화 장면들이 새겨지는데, 성소 내부에 깃든 신성이 밖으로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소의 윗부분은 위쪽으로 상승하는 구조로 축조된다. 이것은 초월적인 세계로의 상승을 의미하며, 높이 쌓아 올린 상부구조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메루(수미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힌두교 신전 건축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전하게 되면서 이 상부구조도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힌두교 신전은 문자 그대로 '신의 집(데바쿨라, 데울)'이다. 힌두교가 융성한 시대에서 '신의 집'은 가장 중요한 봉헌물이었으며, 힌두교 조형 활동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조각은 건축의 부속물적인 성격이 강하게 되어 완성도가 높지 않으며, 힌두교 미술의 정화를 찾고자 한다면 조각보다 신전 건축에 있다고 해야 한다. 470년대에 들어서면 굽타 왕조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어, 제국은 곧 와해된다. 그 후에 여러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북인도와 중인도에 무슬림이 들어오기 전까지 굽타 왕조와 같은 강성한 제국이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지역마다 군웅이 할거하게 되고, 조형 활동의 중심도 급격히 다원화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한 줄기, 즉 한 흐름의 미술사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힌두교의 신전 건축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 나가라 형식의 초기 예

힌두교 건축에 관한 인도 문헌에서는 신전 건축을 나가라Nagara, 드라비다Dravida, 베사라Vesara의 3가지 형식으로 나눈다. 나가라 형식은 주로 동쪽의 오릿사부터 구자라트까지 북인도 지역에서 유행한 것으로 북방 형식이라 하며, 드라비다 형식은 동남단의 타밀을 중심으로 그 북쪽 인접 지역까지 퍼진 남방 형식이라 불린다. 마지막으로 베사라는 '노새'라는 뜻으로, 혼합적인 형태를 의미하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점이 있다. 나가라와 드라비다 형식의 차이는 비마나(성소)의 상부구조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나가라 형식의 상부구조는 높이 상승하는 구조물의 외벽이 몇 개의 세로로 된 띠 모양으로 나뉘며, 각 띠는 위아래로 중첩되는 작은 모티프(차이티야 아치)로 구성된다. 이러한 상부 구조물을 시카라sikhara라 부르며, 비타르가온이나 데오가르의 신전이 나가라 형식의 초기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드라비다 형식에서는 비마나의 상부구조가 중첩되는 수평의 층단으로 구성되고 꼭대기에 둥근 지붕이 올려지며, 둥근 지붕만 시카라라 부른다. 여기서는 나가라 형식의 전개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형적인 나가라 형식은 7세기에 확립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부바네쉬바르의 파라슈라메쉬바라 신전을 고를 수 있다. 7세기에 세워진 이 신전은 비마나와 만다파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카라는 '차이티야 아치' 모티프들이 세로로 된 띠의 위아래를 연결하여 엮어주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꼭대기의 아말라카 위에 칼라샤라는 물병을 올렸는데 이는 물과 관련된 인도 고대의 풍요의 상징이자 우주의 상징을 의미한다. 후대에 신전이 발전하면서 대규모 건물이 세워지고 이에 시카라는 다양한 형태로 꾸며졌다. 시카라를 만들고 정교하게 장식하는 부분은, 조형적인 특징으로 면면히 이어진 인도인들의 심미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석조 신전은 조각으로 형태를 부여하고 장식을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된 형태를 띠며, 이 부분에서 힌두교 석조 신전은 거대한 조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나가라 형식의 초기 예들은 남쪽의 안드라나 카르나타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들은 나가라 형식과 드라비다 형식이 만나는 점이지대였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카르나타카의 아이홀에 있는 두르가 신전이 그 예이다. 결론적으로 초기형에서 출발한 나가라 형식의 힌두교 신전은 10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중인도 카주라호의 신전들과 동인도 오릿사의 신전들이다.

 

3. 카주라호

7세기 중엽 하르샤 제국이 쇠망한 이후 12세기 말에 무슬림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북인도와 중인도에는 여러 갈래의 라즈푸트족이 할거했다. 이 가운데 10세기경부터 약 150년간 카주라호에서 흥기했던 찬델라 왕조는 힌두교 건축의 정화라고 할 만한 신전들을 짓게 되면서 인도미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찬델라 왕조는 카주라호에 80여개의 훌륭한 신전들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은 25개 정도만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락슈마나 신전이다. 954년에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에 따라, 그로부터 10~20여년 전 찬델라 왕조의 7대 왕인 야쇼바르만에 의해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슈누에게 바쳐진 이 신전의 네 귀퉁이에 작은 사당을 하나씩 놓았고, 이는 비슈누의 3가지 형상과 수리야 신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락슈마나 신전보다 크며, 카주라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가진 신전으로는 칸다리야 마하데바 신전이 있다. 작은 4개의 부속 건물이 없음에도 락슈마나 신전보다 크며, 신전의 외벽은 락슈마나 신전과 동일하게 각종 신상과 천녀상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들은 입체적인 고부조로 되어 있기에 신전 건축의 구성적인 성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각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비마나와 만다파 사이에 새겨진 남녀교합상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자세로 남녀가 성애를 나누는 상들과 수음하는 상들이다. 본래도 카주라호의 신전은 건축적으로 아름다움이 드러나지만, 남녀교합상들로 인해 칸다리야 마하데바 신전과 락슈마나 신전이 더욱 유명해졌다. 이런 노골적인 성애를 묘사한 조형물을 건축에 공공연히 표현한 예가 현대 이전의 미술사에서는 유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무슨 이유로 카주라호 신전에 이러한 조각을 새겼는지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었다. 유력한 설명으로 힌두교에서 철학적으로 중시하는 대극 합일의 사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설이다. 카주라호의 경우 특정한 장소, 즉 비마나와 만다파가 만나는 부분에만 남녀교합상을 새겼는데, 이는 상징적인 건축 구조상 이 신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에 각종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카주라호에는 힌두교 신전 외에도 자이나교 신전들도 세워졌지만, 건축 형식은 동일하나 남녀교합상 같은 것은 일체 찾아볼 수 없다.

 

4. 오릿사

오릿사는 고대에 아쇼카가 불심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칼링가국이 위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7세기경부터 나가라 형식의 힌두교 신전 건축이 발달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힌두교도들의 성지로 이름 높았던 오릿사의 부바네쉬바르에는 한때 6000여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중 500여개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이 앞서 살펴본 파라슈라메쉬바라 신전이다. 부바네쉬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은 10세기 중엽에 세워진 묵테쉬바라 신전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오릿사 힌두교 신전 건축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이 신전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구성이 정교하고 조각이 뛰어나다. 이를 세운 힌두교 신전 조영자들은 더욱 대담해져서 11세기 중엽에는 이전의 신전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링가라자 신전을 짓게 된다. 링가라자 신전은 사역이 140×150미터에 달할 정도로 넓으며, 그 안에 부속되는 소규모 신전들과 건물들이 가득 차 있다.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온 이곳은 힌두교도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으로서 비非힌두교도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12세기에 오릿사에서는 7세기 이래 이 지역을 통치해 온 소마밤시 왕조가 망하고 강가 왕조가 새로이 나타났다. 이들의 치세에 오릿사 힌두교 신전 건축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는 신전이 탄생하였다. 부바네쉬바르에서 60킬로미터쯤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코나락의 수리야 신전이 이에 해당한다. 긴 시공 끝에 1258년에 완성된 이 신전은 태양신인 수리야에게 바쳐진 것으로, 수리야 신이 타는 거대한 마차 모양으로 구상되었다. 건물의 각 부분에는 매우 훌륭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때로는 위엄이 넘치고 때로는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이 신전에 부조들을 새긴 정교함과 치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힌두교의 번영을 누린 오릿사에는 13세기 초부터 무슬림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강가 왕조는 무슬림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코나락 신전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위세를 과시했으나, 그로부터 100년도 지나지 않아 오릿사도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코나락은 나가라 형식을 가진 힌두교 신전 건축의 마지막 영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