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슬람의 진출(1192-1526)
인도 미술은 1200년경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는 12세기 이후 인도에서 정치적인 존재로 부상했던 무슬림, 즉 이슬람교도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들은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가 뿌리내린 땅에 새로운 주제와 형식의 미술을 정착시켰다. 이슬람교는 선지자 무함마드(570-632)에 의해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창시된 종교이다.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100여년 만에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동쪽으로는 터키와 이란,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인도에 이슬람의 존재는 중동의 상인들을 통해 7세기부터 알려졌으며, 8세기 초에 아랍인 무슬림이던 무함마드 이븐 하심이 신드(지금의 파키스탄 남부)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슬람교의 본격적인 정착과 이에 따른 건축과 미술의 도입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개종하여 인도 서북부에 진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북인도를 최초로 정복한 이슬람 군주는 12세기 말 아프가니스탄의 구르 지방을 다스리던 무함마드 구리이다. 그는 인도 북부를 빠른 속도로 장악하였고, 사망 이후에는 무함마드 구리의 휘하에 있던 노예장군인 쿠틉 웃딘 아이박이 스스로 북인도를 다스리는 술탄(왕)임을 선포하였다. 이후 250여년 동안 이어진 여러 술탄 왕조는 흥망을 거듭하며 인도에 이슬람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다.
공동체로서의 의식이 거의 부재했던 인도인들과는 달리 무슬림들은 경전인 『코란』을 중심으로 하나의 믿음을 나누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믿음은 수많은 신적 존재를 수용하고 있던 인도인들에게 새로운 사상이었다. 무슬림들이 지켜야 했던 5가지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루에 다섯 번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다. 다섯 번의 기도 중 한 번의 기도는 금요일 정오에 모스크에서 행해야 했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기도 때 군주들이 알라에 의해 자신이 통치권을 천명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였기에, 새로운 영토를 정복한 후에는 무엇보다도 모스크가 먼저 필요했던 것이었다. 신전을 '신의 집'으로 여겨 일반인은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던 힌두교 전통과는 달리 모스크는 신도들의 공동예배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12세기 이전에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지어진 소규모의 모스크를 제외하고는 인도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대표적인 모스크는 델리 남쪽의 쿠왓 알 이슬람 모스크('이슬람의 힘'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는 노예장군 쿠틉 웃딘 아이박에 의해 1192년경 지어지기 시작하여 100여년 동안 계속 확장되었다. 이는 쿠왓 알 이슬람 모스크가 후대 왕들에게도 인도 북부 점령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모스크 안에 지어진 쿠틉 미나르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첨탑으로 꼽힌다. 본래 미나르는 사람이 올라가 기도시간을 알리고 신도들을 부르는 탑이며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망루의 기능도 지니지만, 쿠틉 미나르의 경우 그 높이가 상당히 컸기에(72미터) 실용적인 기능보단 상징적인 의미로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엄청난 높이와 더불어, 첨탑에 새겨진 아랍어 명문은 유일신에 대한 불복종의 결과를 열거함으로써 이슬람의 우위를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쿠왓 알 이슬람 모스크 안에 지어진 건축물 중 중요한 것은 쿠틉의 후계자 일투트미쉬(1210-1236년 재위)의 묘이다. 모스크와 더불어 석조 묘당 역시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도입한 건축 유형이다. 전통적으로 화장을 해온 인도 장묘문화와는 달리,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믿는 이슬람의 내세신앙에서는 매장이 중시되었다. 특히 왕의 묘당 건축은 왕조의 권력을 후계자들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는 정치적인 행위로써 더욱 성행하였다. 묘당 전체와 내부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의 조화는 후대의 인도 이슬람 건축물에 계속하여 나타나는 조형적인 요소가 되었다.
2. 이슬람의 인도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출신들이 인도에 진출하면서 세운 술탄 왕조들은 쿠틉 웃딘 아이박의 노예 왕조 이후 할지 왕조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가운데 투르크계의 기야스 알딘 투글루크는 북인도를 정복한 후 왕조를 설립하면서, 당시 세계적으로 위명을 떨친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델리 동쪽에 새로운 수도 투글루카바드와 거대한 방어용 성곽을 건설하였다. 투글루크의 군대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새로운 수도는 격자형 도로와 요새를 방불케 하는 성곽이 지금도 남아 있다. 투글루크는 이러한 성곽 옆에 자신의 묘당을 지었다. 이 건축물은 인공으로 만든 해자 안쪽에 성곽을 두른 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당의 내부, 입구와 마주 보는 벽면에는 미흐랍이 설치되어, 군주를 유일신 알라와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인도 이슬람 특유의 전통이 처음으로 보인다. 인도 이슬람 장묘 문화의 또 다른 예로 갠지스강 중하류를 정복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왕 셰르 샤 수르의 묘가 있다. 셰르 샤는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묘당을 준비하면서, 죽은 지 60년과 15년이 지난 조부와 부친의 묘를 새로 지었다. 이 묘들은 눈에 잘 띄는 대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당시 델리의 왕족들이 선호하던 돔이 덮인 정방형 평면의 묘당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높은 귀족 출신의 묘"라는 외벽의 문명과 함께 수르 왕권의 계보를 새로이 조작하여 알리는 역할이었다. 셰르 샤는 자신의 무덤을 이슬람 군주들의 무덤 모양으로 선호되던 팔각형 평면으로 지었고, 근처에서 널리 추앙되던 이슬람 성인의 묘 옆에 자리하여 자신의 신성한 권위도 높이려 하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르 왕조 역시 셰르 샤가 사망한 후 위기를 맞이하여 무굴 제국에 왕권을 넘기게 되었다.
3. 남인도의 힌두교 문화
13세기 이후 인도 북부를 정복한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슬람 술탄 중 여럿은 데칸고원과 남인도까지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해 데칸고원 이남은 쉽게 정복되지 않았으며, 지역별로 여러 왕조가 이어졌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왕조는 1336년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카르나타카의 함피라는 도시를 수도로 삼았던 4개의 왕조이다. 함피는 비자야나가라, 즉 '승리의 도시'라고 불렸는데, 이 왕조들을 통칭하여 비자야나가라 왕조라고 한다. 유럽 여행자들의 글에 의하면, 비자야나가라는 인도에서 가장 융성했던 도시 중 하나였다. 비자야나가라의 왕실들은 시바의 한 화현인 비루팍샤를 수호신으로 섬겨, 곳곳에 링가를 모신 사원과 황소 난디 조각을 남겼다. 비자야나가라의 사원 구역에 지어졌던 비루팍샤 사원(1510년경)은 왕실 사원으로, 외벽의 신상 배치와 높은 고푸라, 드라비다 형식의 다층열주식 시카라와 같은 후기 촐라 사원의 특징들을 계승한 모습을 보인다. 왕실의 숭배와 사원 건축으로 인해, 비자야나가라는 이슬람교의 진출에 대항한 인도 고유의 힌두교 문화의 보루로서 현재도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드라비다 형식의 사원을 짓고 전통적인 브라흐만 의식을 고수했던 비자야나가라의 왕들도 필요할 경우, 이슬람교도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왕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4. 종이의 도입과 회화양식의 변화
11세기 이전까지의 인도 회화는 오로지 아잔타 석굴의 벽화와 같은 예시만이 남아 있어, 문헌 기록이나 조각 유물로부터 고대 회화의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인도의 고온다습한 기후와 반복된 전란으로 인해 많은 수의 회화가 파괴되었고, 14세기 이전의 그림으로는 야자수 잎에 그린 불교 경전과 자이나교 경전의 삽화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계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종이가 처음으로 인도에 들어오자 새로운 형태의 회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폭이 좁은 야자수 잎과는 다르게도 넓은 종이는 삽화를 그리기에 적합하였고, 기존의 종교 경전과 더불어 이슬람 군주들의 호화로운 세밀화 제작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종이에 그린 회화를 묶어 만든 책들은 급속도로 인도에 퍼져나가 왕실이나 부유층의 후원을 받는 전문적인 화가 계층도 발생하였다. 이슬람교에 의해 인도 북부가 점령된 후에도 인도 서부에서는 자이나교가 상인들을 중심으로 융성하였다. 특히 자이나교 성인들의 전기를 담은 『칼파 수트라』가 다수 제작되었는데, 자이나교 회화는 세속적인 소재의 회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밖으로는 페르시아의 회화 양식도 중앙아시아계의 이슬람교도들을 따라 들어온 화가들에 의해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율법적인 이유로 종교화에 인물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전통으로 인해 회화의 발전은 더디었다. 이후 15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세속적인 소재를 다룬 책이 만들어지면서 삽화양식도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 왕조의 회화 중 가장 오래된 예로는 인도 중북부의 만두에서 제작되었던 『니맛나마』가 있다. 『니맛나마』(별미 이야기)에는 각 장마다 요리 재료, 요리 방법과 더불어 시식을 하고 있는 술탄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처럼 건축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장차 인도 최대의 제국을 이룬 무굴 왕조에서 인도의 재래 회화와 외래 회화 양식이 결합된 새롭고 독특한 양식이 꽃피우게 되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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