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적 황금기(기원후 300-600년경)
320년 파탈리푸트라에는 새로운 왕조가 열렸다. 이 왕조의 창시자는 찬드라굽타 1세이며, 바이샬리의 리차비족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키워 스스로를 왕중왕(제왕)이라 칭했다. 그의 이름은 마우리야의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데, 의식적으로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마우리야시대의 황금기를 꿈꾼 듯하다. 이를 확증하듯 이 시대에는 아쇼카 석주를 본뜬 주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찬드라굽타 1세에 이어 사무드라굽타(335-375년 재위)와 찬드라굽타 2세(375-415년 재위) 때에 이 왕조는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 인도 북반부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를 굽타왕조(320-550년경)라 불렀으며, 이 시기의 인도인들은 당시 세계의 어느 곳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물질적인 번영과 문화적인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인도 문명의 각 부문에서 완성이 이루어지며 후대의 전범이 마련되면서, 굽타왕조의 시대는 고전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과학이 발전하고, 연극과 음악이 흥성했으며, 문학에서는 인도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칼리다사가 출현하였다. 더불어 미술에서는 장엄하고 우아한 마투라와 사르나트의 불상, 아잔타 석굴의 화려한 채색 벽화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굽타시대의 왕들은 금으로 된 화폐를 찍었는데, 이러한 금제 화폐를 찍은 것은 인도 고대사에서 쿠샨시대와 굽타시대가 유일하다. 그만큼 왕조가 번영을 누렸음을 보여준다. 화폐의 앞면에는 왕의 상이, 뒤에는 주로 힌두교 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불교의 흥성으로 위축되어 있던 힌두교가 굽타 왕조의 후원 아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장엄한 힌두교 신전들이 벽돌이나 돌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이다. 굽타 왕실은 힌두교를 믿었지만 불교에 있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왕이 불교 사원 건립을 후원하였다. 그중 5세기에 샤크라디티야 왕(쿠마라굽타 1세)이 창건한 날란다사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날란다는 이 시기부터 800년간 인도 불교학 연구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대승불교가 사회적인 실체로서 나타난 것도 굽타시대이다. 대승불교가 흥행하면서 불교 미술에도 대승과 관련된 주제가 많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주제는 풍요롭고 안정된 시대를 반영하듯 난숙하고 세련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시기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곳은 마투라와 사르나트, 아잔타이다.
2. 마투라
마투라는 여전히 조각의 중심지로 이름을 알렸다. 앞서 기원후 3세기 후반을 고비로 100년 정도 침체기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이 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4세기 후반부터 다시 발전을 지속하여 5세기에 들어서서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투라의 자말푸르에서 발견된 불입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5세기 전반에 제작된 이 상은 쿠샨시대 불상에 비해 표현이 허점 없이 더욱 정교해졌으며, 그동안 이곳에서 축적된 기술적 역량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모든 부분이 치밀한 비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성스러운 상은 완벽한 비례를 가져야 한다는 인도인들의 조형관을 반영한다. 또한 굽타시대의 불상에는 초월적 존재임을 암시하는 붓다의 초월적인 성격이 한껏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발달한 붓다관觀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상의 형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쿠샨시대의 상들이 활력에 넘치면서도 거칠다면, 굽타시대의 상은 다듬고 또 다듬은 듯한 섬세함이 돋보인다. 이것은 굽타시대의 예술가들이 종교 미술에서도 심미적인 표현이 중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조각 작업을 맡았던 조각공들은 힌두교 상들도 새겼다. 마투라의 불교 조각은 5세기 중엽을 정점으로 막을 내렸고 그 뒤에는 불교미술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돌연한 종말을 맞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이 이후에도 이곳에서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조각활동이 이어졌으나 새로이 흥기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3. 사르나트
힌두교도들의 최고 성지인 바라나시에 인접한 사르나트는 붓다가 첫 설법을 펼친 곳이다. 굽타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르나트가 불교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미미하였다. 앞에서 본 아쇼카의 4사자 주두는 사르나트에서 건립되었으나 궁정의 조각공이 세웠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사르나트에서 만들어진 조각은 쿠샨시대 마투라의 초기 상들의 서투른 모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르나트는 5세기에 들어서서 마투라의 불교 조각 양식을 소화하여 독자적인 형태를 창출하였다. 뉴델리의 국립박물관에 있는 입상은 굽타시대 사르나트 불상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가장 큰 특징은 대의의 주름이 모두 사라진 점이다. 머리와 얼굴의 균정한 형태는 사르나트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몸의 둔중한 형체는 아직 마투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르나트 불상의 가장 완성된 형태는 470년경에 이룩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걸작인 초전법륜상은 인도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초전법륜'은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법륜)를 굴렸다"는 의미로,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한 것을 말한다. 이 상이 사르나트 사원의 어디에 봉안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붓다의 첫 설법지인 이곳의 상징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이다. 이러한 설법상은 사르나트를 중심으로 유행하였고, 다른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초전륜법상은 마투라의 불상만큼 장중한 모습은 아니지만 매우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사르나트에서는 마투라보다도 조상 표현에 있어 더 심미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점은 473년에 만들어진 불입상에서도 볼 수 있다. 굽타시대에 마투라에서 보살상을 별로 볼 수 없던 것과는 반대로 사르나트에서는 보살상도 여러 점 발견되었다. 뉴델리 국립박물관의 관음보살상은 이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관음신앙을 반영하여 제작된 상이다. 보살상은 불상과 달리 머리를 틀어 묶었는데, 이러한 머리 모양은 불교상들이 이 시기부터 융성한 힌두교 미술과 공유한 특징 중 하나이다. 마투라와 달리 사르나트에서는 이 이후에도 12세기까지 오랫동안 불교 활동이 이어졌다. 또한 서인도의 석굴 사원 등 다른 지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4. 아잔타
아잔타에 석굴이 처음 조성된 것은 기원전 1세기이다. 이 무렵부터 약 300년간 서인도에 많은 불교 석굴이 만들어졌음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초기 석굴 조영은 기원후 2세기 후반에 칸헤리 석굴의 차이티야 굴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460년경 굽타 왕조에 속해 있던 바카타카 왕조의 후원 아래 아잔타에서 재개되었으며, 이때부터 20여년간 이곳에서는 20여개의 석굴이 연달아 조성되었다. 아잔타 제19굴과 제26굴은 5세기경 새롭게 만들어진 차이티야 굴이다. 이들 차이티야 굴은 외면부터 내부까지 각 부위를 벽화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엄했다. 초기 석굴과 평면은 같으나 안쪽의 스투파 앞면에 감龕을 만들고 불상을 새겨넣었다. 무불상시대가 지나게 되면서 이제 석굴 불당에서도 불상에 대한 예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19굴의 스투파 앞 감에는 사르나트 불상과 유사한 형태를 가진 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승방굴은 통례대로 방형 평면의 안쪽 세 면에 방들이 배치된 형식이다. 입구와 마주 보는 안쪽 벽의 중앙 깊숙한 곳에도 불당을 만들어 불상을 새겼다. 이러한 승방굴 상당수도 벽화로 장식되었다. 인도에서는 기원후 1000년 이전에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벽화가 거의 전부이다. 이 벽화들은 안료에 접착제를 넣어 그린 것으로 지금까지도 화려한 색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다. 제1굴의 안쪽 불당 입구 좌우 벽면에는 각각 1구의 보살상이 그려져 있는데, 사실적으로 묘사된 얼굴에 음영과 하이라이트를 주어 입체감을 강조하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4세기 이후에 융성한 인도의 세밀화가 매우 평면적인 것과 크게 대조적이다. 이처럼 아잔타에서는 조각과 그림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불전도와 본생도가 벽면을 차지하였다. 제17굴의 바깥쪽 벽면을 장식한 그림은 '베산타라 본생' 혹은 '우다인의 출가'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건물과 인물 묘사는 이러한 불교 벽화들이 기법상 당시의 세속화들에 기초하여 그려졌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아잔타를 필두로 데칸고원 서부에서는 많은 불교 석굴이 만들어졌다. 특히 오랑가바드(7세기)와 엘로라(8세기) 등에서는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등장한 신들과 복잡한 구도의 주제가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 힌두교 미술의 발흥
힌두교는 인도에서 전개된 민족종교의 통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조의 출현과 더불어 교리체계를 갖추어 발달한 종교인 불교나 이슬람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인더스 문명기의 초보적인 형태부터 베다시대의 힌두교, 고대 힌두교, 고전 힌두교 등 여러 단계를 걸쳐 발전해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힌두교는 굽타시대에 완성된 고전적인 힌두교를 가리킨다. 힌두교에서는 시바와 비슈누, 브라흐마의 세 신을 섬긴다고 알려져 있다. 실은 시바를 제1의 신으로 섬기는 시바교, 마찬가지로 비슈누를 섬기는 비슈누교의 2가지로 대별된다. 시바는 일찍이 인더스 문명기에서 이미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인도인들의 뿌리 깊은 신앙 관념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바는 고대의 풍요 신앙이나 남근숭배와 관련 있다고 여겨지며, 위대한 요가 수행자이자 동물의 왕이며 춤의 왕이자 파괴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전적인 힌두교가 완성되어 많은 신상이 만들어지고 신전들이 세워진 것은 굽타시대부터이다. 산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우다야기리에는 굽타시대에 만들어진 20여개의 석굴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제6굴에 찬드라굽타 2세 때인 굽타시대 82년(서기 401년)의 명문이 남아 있어 상당수의 굴이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굴들에는 많은 힌두교 신상들이 이미 도상적으로 확립된 형태로 새겨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제5굴의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바라하(돼지)상이다. 이 부조는 단순한 신화적인 의미뿐 아니라 강가와 야무나 강 사이의 인도 중원 지방을 평정한 굽타 왕조가 지닌 정치적 위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바의 성소였던 제4굴에는 시바의 상징인 '링가linga'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남근을 단순화시킨 것으로 시바와 연결된 고대 남근 숭배의 유풍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시바 신전으로는 석굴 형식으로 만들어진 엘레판타를 꼽을 수 있다 엘레판타는 뭄바이(봄베이) 앞바다의 작은 섬에 위치하며, 섬에 신전을 만듦으로서 대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대륙을 상징한 것이다. 엘레판타 석굴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면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축의 끝에 거대한 삼면의 인면상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 삼면상은 시바의 얼굴을 나타낸 것이다. 중앙의 인면은 위대한 신(마하데바)으로서의 시바의 얼굴이고, 왼쪽의 인면은 흉포한 모습의 바이라바, 오른쪽은 자애로운 모습의 시바 배우자인 우마이다. 이 밖에도 엘레판타 석굴 내부에는 시바의 여러 신화적인 이야기를 나타내는 부조들이 거대한 규모로 새겨져 있다. 참배자들을 압도하는 이러한 부조들은 시바의 신화적인 권능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힌두교도들은 불교도들처럼 성소로서 석굴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기에, 힌두교 신전이 엘레판타 석굴처럼 만들어진 예는 드물다. 그 대신 굽타시대부터는 벽돌이나 돌로 쌓은 독립 건물의 힌두교 신전들을 널리 세웠다. 벽돌로 축조한 비타르가온의 신전은 대표적인 초기 예이다. 석조 건물로는 데오가르의 비슈누 신전을 꼽을 수 있다. 이 신전 건축의 상징과 구체적인 형상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서 상세히 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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