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샨 왕조와 불상의 탄생(기원전후-300년경)
기원전 2세기 말 마우리야 제국이 와해되고 슝가 왕조가 그 영토의 일부를 이어받았다. 앞서 알아본 바르후트 스투파는 슝가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1세기 뒤에는 데칸고원 서부에서 사타바하나 왕조가 나타나며 약 300년간 인도 동남부의 안드라 지방까지 세력을 미쳤다. 그 치하에서 산치 대탑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안드라에서도 불교 사원의 미술이 번성했다. 한편 인도의 서북쪽에서는 찬드라굽타가 마우리야 왕조를 세울 무렵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기원전 32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펀잡까지 원정한 이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에 그리스계인들이 정착하며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수하인 셀레우코스가 아시아의 서반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찬드라굽타와 충돌하게 되고, 양쪽은 화의를 맺어 힌두쿠시 산맥을 경계로 남쪽은 찬드라굽타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마우리야 제국이 와해되자 이때부터 200년간 인도 서북부는 그리스계인, 샤카인, 이란계 파르티아인의 지배가 이어졌다. 기원후 1세기에 들어서서는 중앙아시아계의 또 다른 유목민인 쿠샨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점차 인도로 내려와, 2세기 초의 카니슈카 왕 때에 갠지스 중류까지 포괄하는 제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100여년간 인도 북중부는 쿠샨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쿠샨의 치하에서 인도 미술에는 여러 갈래의 문화를 반영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쿠샨의 왕들이 만든 화폐는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니슈카와 그를 이은 후비슈카의 화폐에는 무려 33가지의 신상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힌두교의 신관과 아울러 시바의 신화적·도상적 표현 방식이 확립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며, 이 불상은 기원후 1세기 이래 만들어진 간다라 불상의 모습과 일치한다. 간다라는 파키스탄 북부의 페샤와르 분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그리스계인이 정착하면서 함께 뿌리를 내린 헬레니즘 양식에 불교 미술이 태동하여 300~400년간 번성하였다. 또 이보다 남쪽, 지금의 델리 근방에 위치한 마투라에서도 인도의 재래 전통에 기초를 둔 조각 미술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5세기까지 마투라는 인도 본토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의 제작지가 되었고, 이곳에서도 간다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불상의 탄생과 더불어 인도에서는 불상이 중심된 불교 미술과 그 밖의 조상造像 미술이 각각 간다라와 마투라 등지에서 융성하게 되었다.
2. 간다라
간다라 미술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도 미술의 본류는 아니다. 내용상 인도의 불교를 표현한 것이었지만, 조형적으로는 헬레니즘 세계의 동쪽 끝에서 일어난 서방 고전미술의 지역적 현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더스강 동안東岸의 유명한 고대도시 탁실라의 잔디알에 세워진 그리스풍 신전은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평면은 그리스식 신전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지만, 배화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은 구조물이 존재함을 통해 이란의 영향 아래 건물의 기능도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전해진 기원전 3세기 이래 이 지역에도 많은 불교 사원이 세워졌다.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인 스투파는 반구형의 인도식을 그대로 본떴지만, 울타리가 없고 돔의 아래쪽에 여러 개의 원형 단을 쌓아 올려 위쪽으로 길어지는 형상을 띠었다. 기단이 대부분 방형으로 꾸며졌는데, 이것은 로마의 제단이나 묘당 건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스투파를 장식한 석조 부조에는 주로 불전도가 새겨졌다. 간다라의 불교 사원에 봉헌된 많은 스투파가 이런 불전 부조로 장식되었기에, 지금 남아 있는 유물의 수도 상당히 많다. 이런 부조에는 인도 본토에 비해 훨씬 다양한 주제가 새겨져 있었고, 간다라의 불교도들은 이런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며 '붓다'가 걸은 깨달음의 길을 마음에 되새겼다. 불전 부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원후 1세기에 간다라에는 이미 불상이 출현하여 불전 장면에도 인간 모습의 붓다가 등장한다. 페샤와르박물관의 한 부조에는 중앙에 붓다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며 앉아 있다. 이와 같이 붓다를 중앙에 배치하는 집중적인 구도는 간다라의 불전 부조에서 불좌상이 등장하는 경우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서방 고전미술과는 구별되는 서사 구도로 헬레니즘 미술의 동방화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붓다는 수염이 나고 머리 윗부분이 높은 모습이어서 이 부조가 간다라 미술에서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임을 알려준다.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얼굴이나 몸을 감싼 옷주름이 비교적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이란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재현을 중시하는 서양 고전미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다라 불상은 인도 본토 불상들에 비해 인물 묘사가 훨씬 구체적이다. 이는 불상의 모델이 되었던 헬레니즘 시대의 신상이나 로마의 군주상에서 볼 수 있는 미술 양식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서방의 상들이 몸을 한쪽으로 틀어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간다라의 불상은 경직된 자세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 조형적인 특성 면에서 간다라 불상은 인도 본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도상 면에서는 간다라에서 확립된 불상의 형식이 인도 후대 불교 미술에서 가장 표준적인 불상형으로 자리 잡았다. 간다라 미술의 전성기는 대체로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였다. 그 이후에도 등지에서 헬레니즘의 유풍이 강하게 남은 소조상들이 제작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는 서양 고전미술풍이 쇠퇴하고 인도 본토의 영향이 크게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5~6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현저해진다.
3. 마투라
마투라는 오늘날 인도의 수도인 델리에서 동남쪽으로 1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간다라와 비견될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으며, 이러한 지리상의 이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숭상된 크리슈나의 탄생지로 이름이 알려졌다. 마투라가 조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다. 마투라 근방의 파르캄에서 발견된 대형 약샤 상은 마투라 조각의 시원을 보여주며, 쿠샨시대에 들어서서는 카니슈카 왕 때에 만들어진 제왕의 권위가 강조된 2구의 제왕상이 크게 주목된다. 그중 입상인 카니슈카 상은 추상적인 평면성을 통해 권위를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특성은 후대 인도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것으로 서아시아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불교 조상으로는 마투라 시내의 카트라에서 발견된 좌상이 현재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한다. 이 상은 마투라 조각 특유의 적색 사암을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이런 경우에는 제작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상세하게 좌상을 보면, 머리에는 커다란 소라형 상투가 솟아 있고 얼굴은 인간의 실제 형상과 아주 닮게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이상적인 인간의 형상은 자연의 다른 것들을 닮아야 가장 아름답다는 유비類比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여러 면에서 간다라 불상과 같이 재현적이지는 않으나, 몸에 충만한 생기가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보이는 것의 차가운 재현에 갇힌 듯한 간다라 불상에 비해 오히려 더 생생한 느낌을 주며, 이는 인도 전통 주류를 형성한 마투라 조각의 특징이다. 마투라에도 많은 불교 사원과 불탑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투라는 후대에 이슬람 지배자들에 의해 많은 것이 파괴되면서 불교 유적은 흔적만 남게 되었다. 불탑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고, 다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부조 등을 통해 인도 다른 지역의 스투파들과 마찬가지로 원형 기단과 반구형 몸체를 가지며 문과 울타리가 둘러진 형식임을 추측한다. 본생도나 불전도 부조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간다라보다 불전 서사 부조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보이며, 소수의 예를 통해 구도나 서사 방법에서 간다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시대 유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석조품으로 판단해 볼 때, 당시 조형 활동의 주류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마투라에서는 자이나교도 성행하여 이 종교의 유물도 꽤나 남아 있다. 자이나교도들도 불교도들처럼 스투파를 세우고 상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자이나교의 성자인 티르탕카라 상이 있으며, 불상과는 다르게 자이나교의 관습에 따라 옷을 입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밖에도 아직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지만 힌두교 상들도 전해진다. 마투라박물관에 있는 시바 상의 아들인 스칸다(카르티케야)를 나타낸 입상이 그 예이다.
4. 안드라
간다라 및 마투라와 더불어 이 무렵 미술의 주요 거점으로 남인도의 안드라를 꼽을 수 있다. 안드라는 인도 동남부의 크리슈나강 유역을 말한다. 이 일대도 교역로 상의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특히 크리슈나강의 항구에서는 멀리 지중해에서 온 배들이 드나들 정도로 해상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 이 지역에서도 불교가 번성하고 수많은 불교 사원이 만들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곳은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콘다이다. 사타바하나의 도읍이었던 다니야카타에 인접한 아마라바티의 불교 사원에는 대형 불탑의 터가 남아 있다. 이 스투파는 기단부가 원형이고, 그 사방으로 제단처럼 생긴 방형 단이 있으며, 그 위로는 5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방형 단과 그 위의 기둥은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징이다. 명문에서 "아야카ayak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5개 기둥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위쪽에 보리수와 법륜, 스투파, 다시 법륜과 보리수가 차례로 새겨져 있다. 불탑을 장식한 부조의 주제는 연꽃 문양, 본생도와 불전도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불전도에서는 아직 불상 대신 상징물을 활용한 무불상 표현이 쓰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도 2세기 말부터는 불상이 등장하였다. 이곳의 불상은 대부분 입상이며, 간다라나 마투라의 불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형식을 가진다. 머리에는 작고 나지막한 우슈니샤가 솟아 있고 나발이 덮여 있으며, 얼굴 묘사가 특히 섬세하여 각 부위 간의 미묘한 연결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특징적인 유형은 초기 불교 미술에서 제3의 불상 유형으로 자리 잡았으며,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에 큰 영향을 주었다. 3세기 중엽에 아마라바티의 사타바하나 왕조가 쇠퇴하고, 익슈바쿠 왕조가 나타나면서 그 도읍인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불교 미술이 약 한 세기간 융성했다. 이곳의 스투파들은 구조상 아마라바티와 거의 동일한 형식이고, 비슷한 주제와 양식이 부조들도 장식되었다. 그러나 조각 양식이 아마라바티만큼 섬세하지 못하다. 익슈바쿠 왕조가 4세기에 멸망하면서, 안드라의 불교 미술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후에도 조형 활동이 소규모로 이어졌으나, 전과 같이 주목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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