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인도(18세기 말 이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무슬림 항해장의 도움을 받아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바닷길을 통해 인도에 방문하였다. 이후 인도의 고급 직물류와 차, 동남아시아의 향료, 그리고 중국의 도자기를 탐내어 유럽 각국은 아시아로 향한 해상무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동인도회사와 같은 합법적인 기구를 통하거나, 혹은 포르투갈의 고아 정복과 같은 무력행사를 통해서 인도에 진출하였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두고 경합하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무굴 제국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마침내 18세기 말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벵골과 북인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영국과 유럽 각국의 관료들과 상인들을 통해 조금씩 인도에 전해지던 유럽 문물은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로 등극하여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밀려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 문물은 인도의 사회 전반뿐 아니라 회화와 건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라는 거대한 땅에 대한 의문점을 가진 영국인들에 의해 제작되어진 예로는 동인도회사 양식(Company Style Painting)이라고 지칭되는 회화를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주로 인도인들의 초상, 동식물, 풍경, 풍습들을 그린 것으로, 식민지 지배자들의 인도 이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풍경화의 경우에는 영국에서 유행하던 '그림 같은(picturesque)' 풍경이 선호되었다. 그리하여 이국적인 경관을 나타내는 힌두 사원이나 이슬람 모스크, 폐허로 변한 궁성과 같은 소재가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19세기 초가 되면서, 크게 유행했던 동인도회사 양식의 회화가 인도에 보급된 사진술로 인해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초기의 사진은 전쟁이나 유적과 같은 소재에 대한 기록적인 경향이 강했다. 즉 동인도회사 양식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서의 정형화된 인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초상 사진이 크게 유행하면서 남인도와 라즈푸트의 여러 왕실은 왕실 작가를 고용하여 수많은 작품을 주문하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왕실에서 의뢰받은 형식적인 왕실 초상화가 대부분이었으나,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도 선보였다.
2. 식민 통치를 위한 건축
1857년에 동인도회사 군대 내의 작은 반란에서 비롯된 대폭동이 전 인도를 휩쓸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의 대부분 지역은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세기 영국인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들은 식민지 행정에 필요한 관공서나 학교, 교회 들이었다. 이 당시 영국 본토에서는 건축양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건축가들이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 양식과 중세 기독교의 고딕 양식의 우위를 서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국 총독부는 인도의 정치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양식을 찾으려는 의도에 따라 서구의 건축양식과 인도, 특히 무굴 제국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소위 '인도 사라센(Indo-Saracenic) 양식'을 선호하였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봄베이(현 뭄바이)는 영국인들과 부유한 인도인들에 의해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졌고, 이후 인도의 '보석 중의 보석'이라 불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딕 양식에 인도 양식이 혼합된 봄베이의 빅토리아 역사(驛舍, 1878-1887)가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 인도 내에서도 독립을 갈망하는 세력이 벵골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세가 확산되자 영국 총독부는 벵골의 캘커타를 떠날 계획을 세웠고, 1911년 영국 국왕 부처의 인도 방문을 말미암아 총독부는 북인도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델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발표 후 건설한 현재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는 뉴델리의 총독관저는 규모 면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하며, 8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뉜 무굴식 정원에 자리잡고 있다. 총독관저는 후기 인도 사라센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무굴 시대 건축과 불교 건축의 모티프를 고전주의 양식의 간결한 선으로 재해석하였다. 이는 다양한 모티프를 통해 인도 건축과 서구 건축을 융합하고자 한 것이다.
3. 근대의 인도 회화와 민족주의
영국 식민 지배가 정착되면서 이전의 궁정화가들을 대신해 개인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화가로는 남인도 왕족 출신인 라자 라비 바르마(1848-1906)와 캘커타의 지식인 출신 아바닌드라나트 타고르(1871-1951)를 꼽을 수 있다. 바르마는 현대적인 요소, 즉 유화라는 매체와 자연주의적인 표현, 전통적인 소재를 적절히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리하여 남인도뿐 아니라 영국인들과 북인도의 여러 왕실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으며, 초기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근대적인 회화의 선두 주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1905년 벵골을 중심으로 영국의 지배를 배척하는 스와라지(자치)와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바르마의 회화는 서양화의 겉모습을 모방한 '타락한 인도화'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바르마의 화풍에 반발하여 쿠마라스와미 같은 미술사학자들은 전통의 미학을 되살리는 운동을 벌인 아바닌드라나트 타고르의 회화를 선호하였다. 타고르는 벵골의 반영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지식인 집안 출신으로, 그는 민족주의적 회화의 기수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바라트 마타>(어머니 인도)가 있다. 타고르는 초기에 무굴 제국의 섬세한 세밀화에 나타난 미학을 추구하였으나, 1900년 일본의 평론가 오카쿠라 덴신과의 만남 이후 여러 회화를 섭렵하면서 인도 회화의 진로를 끊임없이 모색하였다. 결과적으로 서양화와 반대되는 인도 회화의 정수는 '정신성(spirituality)'이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제자를 키우며 벵골의 신新인도화파를 전全 아시아적인 화파로 키우고자 하였다.
4. 국가정체성과 오늘날의 미술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뉜 인도 아대륙의 당면과제는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형성이었다. 거주민의 주된 종교에 따라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파키스탄으로 분할되면서 수많은 분쟁과 혈육상쟁의 비극을 초래했다. 문화와 시각미술계에서는 벵골화파의 회화가 갈수록 반복적이고 진부해지는 것에 대해 반발하면서, 새로운 미술가들이 봄베이나 델리 등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현대'의 관계, 종교 분쟁에 따른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독립 후 인도와 파키스탄, 또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방글라데시 세 나라의 건축에서도 서양과 모던을 동일시하는 입장과 인도 전통의 건축양식을 재현하고자 하는 입장이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켰다. 여기서 독립 후 아대륙의 건축은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회화와 조각 역시 독립 후 밀려드는 서구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1947년 이후 많은 진보적인 미술 단체들이 봄베이와 캘커타 등지에서 일어나면서, 젊은 화가들은 과거 인도 아대륙 미술의 단순한 재현이나 모방, 재해석 외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크불 후사인, 프란시스 수자, 사예드 라자, 미라 무케르지가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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