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굴 미학의 수용과 변모(17-18세기)
아크바르 이후 무굴 제국에 영입된 힌두 왕조의 지배자들은 스스로를 라즈푸트, 즉 '왕의 아들'이라 칭하였다. 라즈푸트는 인도 고유의 계급 중 크샤트리야를 부르는 호칭 중 하나였으나, 15세기 이후에는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을 중심으로 부계 혈통과 결혼으로 맺어진 힌두 무사 계급을 지칭하게 되었다. 무굴 제국에 영입된 후에도 라즈푸트족들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수도에 무굴 건축과 힌두교 신전 건축 양식이 섞인 궁성과 사원을 다수 지었다. 특히 라즈푸트족은 인도 북서부에 수많은 요새를 남겼는데, 이 요새들은 8~9세기부터 소규모로 존재하던 산성들을 15세기 이후에 확장 혹은 재건한 것이다. 전형적인 라즈푸트 산성의 예로는 라자스탄의 사막 도시 조드푸르가 있다. 이곳에서는 견고한 성곽 내에 중정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배치된 인도 고유 건축 양식을 반영한 궁전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까지 무굴 제국에 저항한 이들이 바로 서인도의 메와르를 지배한 라즈푸트족이다. 이들은 수도를 세 번 옮겨가며 무굴 제국에 항거했으나 결국 17세기 초 자한기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무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많은 라즈푸트 군주들은 새로운 수도를 지어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18세기 초에 자이푸르를 지은 암베르의 군주 사와이 자이 싱(1700-1743년 재위)이 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확장된 궁성 건축 중 유명한 것은 궁중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축제나 행렬을 구경할 수 있도록 수많은 창문을 열어서 지은 하와마할이 있다. 라즈푸트족은 건축 외에도 초상화나 힌두교의 성전과 서사시의 필사본 회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이러한 라즈푸트 회화에서도 무굴 제국의 회화양식과 인도 고유의 회화양식 사이의 긴장된 대립과 조화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암베르를 지배했던 라즈푸트족의 회화로는 무굴 회화의 영향이 두드러진 초상화가 많아 남아 있다. 이와 반대로 메와르를 다스리던 라즈푸트족의 회화는 왕족들이 주문한 힌두교 성전의 필사본이 대부분이며, 양식적으로도 무굴 회화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양식적인 차이는 무굴 제국과의 평화가 성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자가트 싱 2세(1734-1751년 재위)의 치하에서 화려하고 독특한 예들이 제작되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세로가 긴 무굴 회화의 형식을 배제하고 가로가 긴 전통적인 서인도 회화의 형식을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가트 싱이 주문한 『라마야나』 필사본 그림이다.
2. 음악과 미술의 조화 - 라가말라
라즈푸트 미술에 대한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라가말라이다. 라가말라는 『라마야나』나 『바가바트 푸라나』와 같은 힌두교 성전을 묘사한 세밀화 외에 가장 많이 그려진 소재이다. 라가말라는 '해조(raga)의 화환(mala)'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도 전통음악에서 받아들인 개념으로서, 라가는 음조와 가락이 어우러져 표현하고자 하는 분위기, 즉 사랑과 연민, 기다림과 같은 감정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꽃을 묶어서 화환을 만들듯이, 라가를 묶어 한 권의 책을 만든 것이 바로 라가말라이다. 인도 고유의 문헌들은 9세기부터 라가를 여러 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나, 가장 흔히 알려진 분류 방식은 6개의 남성형 '라가'와 라가마다 딸린 5~6개의 여성형 '라기니'를 합하여 36개로 모은 것이다. 각각의 라가와 라기니들은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와 같은 감정들을 라사rasa라 지칭한다.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라가는 <바산타 라기니>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봄날의 희열을 크리슈나와 춤추는 여인들을 통해 나타냈다. 이렇게 라가를 통해 묘사된, 목동인 크리슈나와 고피(소를 치는 여인)들, 영웅과 연인, 왕과 왕비 사이의 육체적인 사랑은 곧 신에 대한 헌신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1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한 박티bhakti 사상은 신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슬람교의 성인 숭배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은 박티 사상은 비슈누 신앙, 특히 크리슈나 숭배를 중심으로 빠르게 인도 북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 라자스탄과 파하리의 세밀화
무굴 제국의 여섯 번째 황제인 오랑제브가 즉위한 후 정통 이슬람교로 회귀하면서 우상숭배와 제작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수많은 궁정화가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야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라즈푸트의 군주들이나 인도 북부의 펀잡 지방 왕족들 밑에서 새로이 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무굴 제국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라즈푸트 회화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700년 이후 약 200여년 간 라즈푸트 회화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무굴 제국과 달리 문헌 기록과 제작지 등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아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18세기 이후 라즈푸트 회화는 대부분 궁정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소재 면에서는 종교화와 라가말라, 왕실 초상화 등 종류가 다양하다. 라자스탄 지방 중 메와르와 접경하면서 혼인동맹을 맺고 있던 분디와 코타의 회화는 17세기 중반부터 특유의 화풍을 정립하였다. 주로 라가말라, 『바가바트 푸라나』, 혹은 연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메와르 회화보다 깊은 색조와 치밀한 구성을 보인다. 다음으로 히말라야 산맥 아래의 지방 중 바소흘리의 회화는 파하리 화파에서도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다. 바소흘리 양식으로 가장 유명한 예는 15세기의 시인 바누다타가 산스크리트로 지은 『라사만자리』의 삽화들이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파하리 회화는 캉그라 지방을 중심으로 이전보다 세련된 양식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양식은 당시 무굴 제국의 회화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굴 제국의 회화양식이 이 지방으로 전파된 경로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전의 바소흘리 회화에 비하여 유려한 필체와 부드러운 색조 등이 특징적이다.
4. 남인도의 이슬람과 힌두 왕조
전통적으로 남인도는 데칸고원이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북인도와는 성격이 다른 미술을 선보였다. 무굴 제국이 북인도와 중인도를 점령할 무렵 남인도에서 번성한 대표적인 왕조로는 비자야나가라 왕국을 정복했던 아딜 샤히 술탄 왕조와 인도 동남부를 다스렸던 부유한 나야카 왕조가 있다. 아딜 샤히 왕조는 카르나타카의 비자푸르를 중심으로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말까지 그들 나름의 독특한 이슬람 미술을 발전시켰다. 아크바르부터 자한기르시대와 동시대에 비자푸르를 다스렸던 이브라힘 아딜 샤 2세는 무굴 제국의 순니파 이슬람과 다르게 이란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여, 보다 신비주의적인 종교 경향이 강한 군주로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의 어두운 색채와 바람이 부는 듯, 안개가 낀 듯이 표현된 자연 배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남인도의 타밀나두를 지배했던 나야카 왕조는 비자야나가라 왕국에서 파견되었던 지방 총독들의 후예로, 16세기 중반 비자야나가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들은 18세기 중반까지 동남아시아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이슬람이 인도에 진출한 이후에도 번성한 힌두 왕조의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시바를 숭배하던 왕실의 신앙에 따라 곳곳에 수많은 힌두교 사원이 세워졌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로는 수도 마두라이의 미낙시 순다레슈바라 사원이다. 이 사원에 있는 4개의 거대한 고푸라, 열주회랑을 따라 벽화로 표현된 시바와 미낙시의 결혼과 이적 장면 등은 남인도 전통 힌두교 사원 건축과 회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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