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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서역, 동남아시아미술사

동양미술사 - 서역(서역 미술 양식의 형성과 전개-1)

by cloudy_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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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전형적인 '서역 미술 양식'은 앞서 설명한 미술 양식을 토대로 5, 6~7세기경에 대체적으로 성립·전개된다. 이 시기 대표적인 미술로는 서역 남도 호탄 라왁 사원지의 조각(그룹 2)을 비롯하여 쿠차 지역의 키질 석굴 벽화 및 조각, 툼슉 사원지, 카라샤르의 조각 등을 꼽을 수 있다.

 

1. 호탄 라왁 사원지의 소조상(그룹 2)과 십자형 불탑

라왁 사원지의 조각 중에는 앞서 본 라왁 사원지 소조상(그룹 1)과는 다른 계통을 지닌 또 다른 소조상(그룹 2)이 있다. 그룹 2의 소조상은 몸에 밀착된 얇은 옷과 마치 띠를 두른 것 같은 옷주름을 가지는데, 이는 굽타 조각의 영향이 현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양 허리선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주름과 주름 사이를 이어주는 깊은 U자형 주름이 발까지 이어지는 특이한 옷주름 선은 서역 조각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조상과 함께, 라왁 사원지에는 사방에 층계가 놓여 있는 십자형 평면의 불탑도 있지만 그 예가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탁트-이-루스탐, 간다라 샤-지-키-데리 카니슈카 대탑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십자형 평면의 탑은 시대가 떨어져 7~8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그동안 5세기로 알려졌던 라왁 사원지의 십자형 불탑과 소조상(그룹 2)의 제작 시기 역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라왁 사원지에서 밀교의 다비상多臂像이 1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7~8세기 호탄국 내의 유적지에서는 밀교의 다비상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추가로 그룹 2의 소조상은 북위 태평진군 연간(440-450)부터 태화 연간(477-499)까지의 불상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태평진군 4년(443)명 불입상, 태화 19년(495)명 석불입상 등이 있다. 최종적으로 보면 간다라 양식의 영향이 보이는 그룹 1은 5세기 전반경, 그리고 적극적인 신체 표현과 띠 주름 등의 특징을 지닌 그룹 2는 5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즉 라왁 사원지가 조성된 5세기는 당시 호탄 불교의 전성기임을 알 수 있다.

 

2. 단단-윌릭 사원지의 비사문천

완전한 갑옷을 입은 모습의 사천왕상은 호탄의 동북 방향에 위치해 있는 단단-윌릭 제2사원지 동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단단-윌릭 사원지는 약 20여개 정도 확인된 상태이다. 이 중에서 제1, 2사원지는 모두 내·외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으며, 나무를 기둥으로 하여 토벽을 만들고 그 위에 천불도 등의 벽화를 그려놓고 있다. 그 중 제2사원지 동벽에 위치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비사문천이 특히나 주목할 만하다. 비사문천은 네 모서리마다 각 1구씩 서 있던 사천왕 중 한 구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상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며, 발 아래 악귀만이 머리를 잃은 채 남아 있다. 간다라의 사천왕은 대부분 숄을 걸치고 도티(면포)를 입은 귀인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할도 국가의 호국신이라기보다는 천계의 신으로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 중 사천왕의 우두머리격인 비사문천은 나머지 천왕들과 다른 형상을 취한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다라 지역에서 비사문천이 단독으로 봉안되거나 독립된 신앙으로 전개되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반면 서역의 사천왕은 들어올 때부터 호국·수호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갑옷을 입고 긴 장화를 신으며 악귀를 밟고 있거나, 라왁 사원지의 예처럼 발 아래에는 지천녀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호탄에서는 사천왕 중 비사문천이 독립되어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서 믿어졌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 단단-윌릭 사원지의 목판그림과 신출토 벽화

6~7세기경 목판 위에 그려진 그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서 단단-윌릭 사원지에서만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목판그림은 대부분 불상의 대좌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자들이 불상에 봉헌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단단-윌릭 사원지에서 출토된 목판그림 중, 호탄 지역의 전설을 토대로 한 것으로는 잠종전설도와 서왕전설도가 있다. 잠종전설도는 제10사원지에서 발굴되었고, 서왕전설도는 제4사원지에서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2002년에 새롭게 발견된 벽화 중 일명 '서역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주목할 만한 불좌상이 있다. 단단-윌릭 사원지의 지표면 바로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원래 사원의 벽면 일부였을 것이다. 또한 이 벽화는 불상의 얼굴이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중앙에 또 다른 본존이 있었고 이를 둘러싸고 있던 불상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함께 발견된 벽화 중 어깨에서 불꽃이 솟는 모습의 소위 '염견불焰肩佛' 입상이 있다. 입상의 왼쪽에는 크고 작은 불좌상이 있는데, 모두 왼쪽을 바라보고 있어 마찬가지로 중앙의 본존을 둘러싼 불상군의 일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많은 유물이 출토된 단단-윌릭 사원지는 8세기경 티베트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4. 쿠차와 석굴

쿠차는 천산 산맥의 남쪽, 서역 북도에 위치해 있다. 서역 남도의 호탄과 함께 서역 최대의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이며, 이곳의 벽화와 조각은 서역 미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은 이 나라를 구자, 굴지, 굴자, 구이 등으로 표기해 왔다. 이 표기들은 산스크리트어 쿠치의 음역으로 '곡궁' 또는 '굴곡'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기를 사용한 이유로는 아마 굴곡이 심한 이곳의 지형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지만, 국가 체제를 갖춘 형태의 나라가 성립되어진 것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쿠차국은 한무제(기원전 141-기원전 88년 재위)를 기준으로 당시 인구 8만여 명, 승병 2만여 명에 달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전한前漢 무렵 이미 국가 조직을 갖춘 나라였을 것이다. 한편 불교는 대체로 기원전후에 쿠차로 유입되었으며, 3세기 중엽에는 쿠차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대唐代 쿠차에서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었는데, 당시 고구려 출신 고선지도 바로 이곳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또한 혜초도 인도에서 이곳 쿠차를 거쳐 장안을 돌아갔으며, 조선족 화가 한낙연도 쿠차와 관련이 깊다. 한낙연은 1947년 석굴 정리 때 새로운 굴을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벽화가 잘 남아 있는 제69굴이 그것이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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