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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서역, 동남아시아미술사

동양미술사 - 서역(서역 미술의 시작)

by cloudy_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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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지리적인 개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방, 이란, 동투르키스탄, 그리고 서투르키스탄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 서투르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의 5공화국을 말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서역으로는 동투르키스탄, 즉 지금의 신강 위구르자치구를 일컫는다. 이 포스트에서 다루는 서역은 후자에 해당하며, 서역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되 가능한 한 최근 발견되거나 출토된 작품을 포함하여 설명할 예정이다.

 

서역 미술의 시작(기원전후-4, 5세기)

서역에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는 구석기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이른바 '미술품'의 흔적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역의 선사시대 유적은 투르판 분지, 로프 노르 호수 서쪽에 주로 남겨져 있었다. 특히 로프 노르 호수 주변의 누란 유적지에서는 이미 채도가 확인되었고, 돌과 흙벽돌로 지은 방형주거지도 발견되었다. 누란은 서역 남도와 서역 북도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위치하며, 타림 분지를 흐르는 거의 모든 하천이 누란의 로프 노르 호수로 모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곳 누란은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거주하였고, 그 결과 서역의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고분군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란의 대표적인 고분군은 기원전 2000년의 공작하 고묘古墓와 기원전 2000-기원전 1000년의 소하묘小河墓가 있다. 특히 소하묘에서는 미라와 함께 출토된 목제 가면이 있다. 유난히 높은 코와 이빨이 특징적이며, 이빨의 경우 새 다리의 뼈를 나란히 붙인 형태이다. 이 가면은 미라의 가슴 위에 놓인 상태로 매장되어 있다. 다른 출토품으로는 호양목으로 조각한 목조 조각이 있다. 총 3점이 발견되었는데, 키가 2미터 이상이다. 이 목조상들은 무덤 앞에 세워져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거나 죽은 자의 가족을 대신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목조조각이 발견되면서, 서역에는 적지 않은 양의 선사시대 유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나 본격적인 미술의 시작은 기원전후경부터이다. 서역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유물은 주로 서역 남도에 남겨져 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는 당시 서역 남도에 선선국과 호탄국(우전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선선국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누란, 미란, 니야가 있으며, 호탄국에는 라왁 사원지, 단단 윌릭 사원지 등이 있다. 『한서』 「서역전」에서 말하는 선선국의 수도 우니성은 누란을 말하며, 누란 고성古城은 로프 노르 호수 서쪽에 위치한다. 대표적으로 누란 고묘古墓에서 출토된 모직물 헤르메스 상이 있다. 비록 단편이지만 화면 중앙에 헤르메스임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7세기 당시 이미 누란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누란은 인근의 로프 노르 호수로 인해 물이 풍부하기는 했지만 주변이 모두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영토 확장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다른 나라의 토지를 빌려 농작하고, 이를 자국에 반입했다는 당시 누란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 결과 선선국의 수도였던 누란은 기원전 77년부터 5세기 중엽 북위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존속하고 있었지만, 5세기 말경에는 북방 유목민의 침입으로 황폐해지고 방치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 요트칸의 테라코타

선선국의 서쪽에 위치한 호탄국은 특히 인근 강변에서 채집되는 연옥이 유명하다. 이에 호탄의 옥은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이란과 이라크까지 수출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중국 옥기가 바로 이곳 호탄의 연옥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른 시기부터 호탄국과의 간접적인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옥으로 인해 생성된 재력과 지위는 호탄국의 미술에 크게 기여하였다. 실제로 서역 남도의 호탄국은 서역 북도의 쿠차국과 함께 서역 미술을 대표하는 수많은 미술품이 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요트칸은 바로 호탄국의 도성지였다. 지금의 호탄시에서 서북쪽으로 1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대부분 붉은색을 띤 많은 수의 테라코타가 출토되었다. 특히 주목할 출토품은 대량으로 제작된 원숭이를 의인화한 상으로, 원숭이는 이곳 서역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기에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리고 호탄은 인근 요트칸의 테라코타뿐만 아니라 서역 최초의 불교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금동불두가 출토된 곳이다. 이처럼 호탄이 서역 남도의 도시국가 중 가장 번성한 문화의 중심일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연옥 채취로 인한 부의 축적이겠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는 두 개의 강, 즉 백옥강과 흑옥강이 있어 남북으로 영역 확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포함한다.

 

2. 호탄의 금동불두

서역 불교 미술의 본격적인 출발은 호탄에서 출토된 금동불두 2점, 그리고 미란 사원지의 벽화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서역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불교 미술품이다. 서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서역인들이 불교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불교는 서북 인도에서 호탄을 지나 서역 남도의 여러 도시에 가장 먼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겨진 초기 불교 유적들은 서역 남도의 동쪽 지역인 미란, 누란, 니야에만 집중되어 있다. 비록 호탄에는 초기 불교 유적이 남겨져 있지 않지만, 금동불두 2점이 호탄에서 수습되었다. 이 금동불두는 서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미술품의 예들로, 제작 연대는 3세기 말~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특히 금동 제품이 희귀했던 이곳 서역으로서는 귀중한 자료이며, 불두의 상태도 매우 온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견지가 호탄 내에서 어디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중국의 금동불상 중 하버드대학 색클러박물관의 금동불좌상의 성분을 감식해 본 결과, 호탄의 금동불두와 동일한 성분임이 밝혀졌다. 실제로 이들은 양식적으로 동일한 계통일 뿐만 아니라 육계의 정상 부분에 사각형 구멍이 있다는 점도 상통한다. 이 사각형 구멍은 사리기를 안치하였거나, 직접 사리를 봉안하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3. 미란의 벽화

호탄 금동불두의 얼굴은 서역 남도의 동쪽에 위치한 미란의 벽화와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벽화가 발견된 미란 사원지는 지금의 차르클릭현에서 동북쪽으로 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현재 미란에서는 모두 15개의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이 중 티베트 사원지 1개를 제외한 14개는 모두 불교 사원지이다. 미란 벽화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날개 단 동자>가 있다. 벽화가 있던 미란 제3사원지는 사방에 출입문이 존재하는 차이티야이다. 이곳에서 <날개 단 동자>는 회랑의 안쪽 벽에 그려져 있는데, 꽃줄 위아래로 모두 24구의 동자와 각종 인물상 중 굵은 꽃줄 위쪽에 배치되어 있다. 동자 위쪽에는 <붓다와 승려>, 붓다를 향해 예배하는 왕 등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는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3사원지의 벽화 중 <붓다와 승려>에 등장하는 붓다의 모습은 앞서 본 호탄의 금동불두와 하버드대학 색클러박물관의 금동불좌상과 동일한 형태이다. 1989년 늦가을, 오럴 스타인이 발견한 <날개 단 동자>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벽화가 또 다시 발견되었다. 이 사원지는 스타인의 편호에 따르면 미란 제2사원지에 해당한다. 날개를 단 동자는 단 2구만 남겨져 있으며, 간다라와 동일한 꽃줄을 멘 동자의 모티프는 서역에서는 미란 사원지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미란 사원지는 선선국의 영역 내에 건립된 최대의 사원지이다. 미란 사원지에서는 앞서 본 미란의 벽화들과 더불어 쿠샨 왕조의 유물도 발견되는데, 이에 대해 당시 쿠샨 왕조와 선선 왕조 사이에 긴밀한 접촉이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즉 선선국이 쿠샨 왕조로부터 정치, 경제 및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4. 미란의 소조불상

불상의 경우, 미란의 제2사원지와 15사원지에서 발견되었다. 서역의 조각은 주변 환경의 특성상 대부분 흙으로 만든 소조상의 형태를 가진다. 미란의 조각들 역시 모두 소조상이며, 동일한 크기의 선정인 불좌상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소조상은 주로 탑을 둘러싼 벽의 내외벽면이나 탑의 기단에 안치하였다. 또한 조각은 단독으로 조성하였고, 봉안한 환조는 없으며 모두 벽에 붙여 제작한 고부조의 상들이다. 당시에 미란은 서역 남도를 따라 서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도시였다. 특히 한대 이후 법현이 길을 나섰던 때, 즉 400년 전후까지의 서역 남도는 구법 순례승이나 상인들에게 가장 많이 이용되던 길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소불상은 서역 지방에서 이른 시기의 불상일 뿐만 아니라 서역의 동쪽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까우면서도 서역의 다른 지역보다 더 간다라 요소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5. 니야의 미술과 신출토 벽화

니야는 『한서』에서 가리키는 정절국精絶國에 해당한다. 니야에서 출토된 하로슈티 문서를 분석해 본 결과, 정절국은 선선국의 지배 아래 있었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니야에서는 선선국 누란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종류의 한나라 비단이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니야에서 발견된 신출토품으로 중요한 것은 니야 불교 유적의 벽화이다. 이것은 원형 두광을 지닌 불좌상의 상반신인데, 굵은 선으로 구획된 할재의(분소의)와 팔자수염이 특징이다. 유적지 부근에서 "태시泰始 5년(269)"의 묵서가 있는 목간이 발견되기도 하여, 대략 3~4세기경의 불교 사원임을 알 수 있고, 벽화 역시 비슷한 시기로 볼 수 있다.

 

6. 호탄 라왁 사원지와 소조상(그룹 1)

라왁 사원지는 지금의 호탄시 동북쪽 백옥강 동쪽 연안의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이중의 담장이 둘러쳐진 형태이다. 이러한 이중 담장은 그 유례가 많지 않은데, 위에 지붕을 덮어 회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탑의 기단부가 아닌 불탑을 둘러싼 담장의 안팎에는 불상을 병렬로 배치했는데, 이 경우는 간다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서역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라왁 사원지의 소조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다.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이중의 담장 중 안쪽 담장의 내벽에 세워진 200여 구에 이르는 불상과 보살상들이다. 이들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큰 대불은 통견 형식의 불의를 걸쳤는데, 옷을 입은 형식과 옷주름을 표현한 방식 등이 간다라 불상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들 소조상은 편의상 그룹 1로 지칭한다. 라왁 사원지의 그룹 1 중에는 특이한 광배를 지닌 불입상이 존재한다. 화불化佛이 마치 부처의 몸에서 솟아 나오는 형상을 지닌 광배인데, 내벽의 안쪽 모서리마다 2구씩 있다. 이와 같은 도상은 간다라의 탁티-바히, 사리-발롤, 마르단 등지에서 출토된 다불화현多佛化現상들과 이미지가 일치한다. 그러나 존명에 대해서는 석가모니불 또는 노사나불로 보는 2가지의 견해가 있지만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처럼 라왁 사원지의 불상들은 다불화현의 독특한 광배 이미지라든지 발 아래로 지천녀를 두고 있는 비사문천, 아울러 상들이 대불大佛이며 천불千佛이 넘는 다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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