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기 중국 당나라의 정치 세력 확장과 더불어 당대 안서도호부가 쿠차로 옮겨오면서 중원의 한승漢僧들도 서역으로 옮겨온다. 또한 석굴의 조영과 사원 경영에 한족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당풍의 회화와 조각이 서쪽으로 전래되었다. 그 결과 서역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주로 서역 미술이 중국을 비롯한 동쪽에 영향을 주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9세기 중엽이 되면, 위구르인들이 투르판을 점령하면서 위구르 양식도 나타나게 된다.
1. 쿰투라 석굴과 벽화
서역 북도의 쿠차를 대표하는 석굴로는 키질 석굴과 함께 쿰투라 석굴이 존재한다. 쿰투라 석굴의 기본 구조는 키질 석굴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며, 굴 내부의 불상 배치 형식 또한 흡사하다. 쿰투라 석굴 초기에는 굴의 벽화들이 같은 지역의 키질 석굴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마름모무늬인 능형문 안에 각종 인연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최근 알려진 제21굴 주실의 돔형 천장의 보살도가 특징적이다. 이 보살도는 중앙의 연화문 주위를 13개의 구획으로 나눠 각각의 구획에 화려한 채색의 보살을 1구씩 배치한 형태이다. 쿰투라 석굴 역시 키질 석굴과 동일하게 불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굴은 드물며, 제20굴과 제79굴에서 발굴된 소조불좌상 단 2구만 온전하다. 또한 제70굴과 제71굴에서는 불좌상의 석심이 각각 1구씩 발굴되었다. 이처럼 쿰투라 석굴의 초기 예들은 앞서 본 키질 석굴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나라가 지배하기 시작한 7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굴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 중 불설법도는 제43굴의 천장에 있던 것으로, 붓다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얼굴 모습과 필선, 그리고 광배 안쪽의 무늬는 중국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천부상 역시 중국의 영향이 엿보이는 쿰투라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실제로 쿰투라 석굴에는 '금사사金沙寺'라는 중국인 사찰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2. 투르판의 고성
서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투르판은 해면보다도 낮은 지대와 분지를 가진 지역이다. 이곳은 원래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이용하여 만든 특수한 관개수로, 즉 카레즈Karez의 발달로 많은 토지의 개발이 가능하였다. 또한 그 위치가 서역 북도가 시작되는 입구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타림분지를 장악하여 서역 시장과 동서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투르판은 중국뿐만 아니라 천산 산맥 북쪽의 북방 유목민족이 탐내는 요충지였으며, 그 결과 예로부터 이 땅을 둘러싼 많은 분쟁이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지리적인 상황은 투르판이 다른 오아시스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 즉 불교를 위시하여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 등 다양한 종교를 숭상하고,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종교 미술을 발전시키게 만들었다. 현재 투르판의 고성으로는 교하고성, 고창고성이 있고, 석굴 사원지로는 베제클릭, 토육, 셍김 아기즈 석굴, 그리고 아스타나 고묘가 있다. 투르판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는 7세기 중엽 이전에는 서역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간다라적인, 혹은 간다라 양식이 서역화된 양식으로서 적지 않게 만들어졌다. 그 이유로는 투르판의 지배층이 한인계였지만 선주민들은 이란계 혹은 투르크계인이었으며, 또 서역 북도의 기점에 위치하여 여전히 서쪽의 오아시스 국가들과 잦은 왕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8세기 후반, 투르판은 티베트족과 위구르족과의 쟁탈 지역이 되면서 결국 위구르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9세기 중엽부터 투르판에는 위구르 왕조(840-1283)가 세워졌고 13세기 말, 그 왕가가 감숙성 영창으로 이주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베제클릭 석굴은 바로 위구르시대의 대표적인 석굴이다.
3.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과 부장품
아스타나 고분군은 국씨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묘지이다. 아스타나는 '휴식과 영면'의 의미를 가진 위구르어로서, '영원히 잠든 묘지'를 일컫는다. 이러한 아스타나의 분묘는 계단형 묘도와 그 끝에는 입구가 있는 등의 형식이 대개 비슷하다.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 유물로는 복희여와도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40점 가까이 있으며, 이는 묘실의 천장에 걸려 있거나 목관을 덮은 상태, 혹은 시신의 옆에 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복희여와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지극히 중국적인 모티프이긴 하지만, 투르판에서는 복희여와를 단독 화면으로 표현하고 있어 중국 내지의 복희여와와는 구별된다. 또한 이곳에서 수습된 투르판 문서 역시 서역 미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문서는 대부분이 2차로 이용된 폐지이다. 즉 관청에서 관련 문서를 보관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이를 폐지로 불하하는데, 당시 지역의 주민들이 이 폐지를 잘라 부장품의 도구나 의류로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투르판 문서를 보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사상, 종교, 군사,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서, 투르판 지역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 사료가 되었다.
4. 베제클릭 석굴 : 서원도와 마니교 미술
베제클릭 석굴은 투르판시에서 동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인 무르툭강의 계곡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곳'이라는 의미이다. 베제클릭 석굴은 투르판 지역의 석굴 중 굴의 숫자가 가장 많고 남겨진 벽화가 많기에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석굴이다. 또한 서역의 다른 석굴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수난과 파괴가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벽화의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였으며, 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벽화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 그 면모가 비교적 상세히 밝혀져 있다. 베제클릭 석굴의 개착 연대는 국씨 고창국 시기인 499~640년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석굴로는 제15굴과 제20굴이 있다. 이 두 굴은 서원도의 15개 주제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도는 모두 전생의 석가모니 부처가 과거불過去佛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에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이야기를 다채롭게 윤색하여 그린 것이다. 베제클릭 석굴이 있는 투르판에는 3세기경 불교가 유입되어 13세기까지 약 천 년 이상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마니교와 동방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도 유입되어 신봉되어 왔다. 특히 베제클릭 제38굴은 마니교 회화와 건축의 규범을 제시하는 기준 석굴로서 주목받았는데, 이는 1990년대 초반 위구르 명문이 해독됨에 따라 베제클릭에서 마니굴을 판별해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니굴에 그려진 마니교 벽화는 주로 흰색 바탕의 벽면 위에 그려진다. 이러한 마니교도들이 펼친 적극성은 다른 종교들과 충돌이 잦았으며,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달아나 사마르칸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사마르칸트에서 교화된 신도의 대부분은 동서 교역을 담당했던 소그드 상인이었고, 이들에 의해 마니교는 투르판에 전해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이주형 외 5인 저, 동양미술사(하), 미진사, 2007
'미술사학 > 서역, 동남아시아미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미술사 -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미술) (0) | 2024.03.27 |
---|---|
한국의 서역 미술 (0) | 2024.03.26 |
동양미술사 - 서역(서역 미술 양식의 형성과 전개-2) (0) | 2024.03.24 |
동양미술사 - 서역(서역 미술 양식의 형성과 전개-1) (0) | 2024.03.23 |
동양미술사 - 서역(서역 미술의 시작) (0) | 2024.03.22 |